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슬픈 연대/강해림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2. 9. 22:25

   블랙리스트

 

   강해림

 

 

   장미가 꿏 피우기를 거부하고 묵언 시위를 했더니

 

   동네 약국의 약들이 서로 색깔과 출신 성분이 다르다고

같은 진열장에 있기를 거부했는데

 

   산에 가서 물고기를 찾고 강에 가서 나무를 찾았더니 불

순분자라나 뭐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시치밀 뚝 떼었더니

 

   혹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눈을 두려워했으므로, 퇴폐라

는 딱지를 붙여 버렸는데

 

   먹구름들끼리 심심해서 삼삼오오 몰려다녔는데 수상한

거래의 정황이 포착되었다나 어쨌다나

 

   검열에 걸리고도 의기투합한 문장들이 조롱과 풍자로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밤의 기밀문서를 빼돌린 손목들은 대부분 화사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주홍 글씨가 새겨지고

 

   머리에 빨강 물을 들이고 집회에 나갔더니, 아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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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발췌)

블랙리스트의 위기와 고독의 기표들/홍일표(시인)

 

   시는 익숙한 문법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반복이나 답습을 거부하는 곳에서 시는 최초의 얼굴을 가지고 나타난다. 황현산은 김수영의 시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의 시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기존의 개발된 코드나 지적 체계에 따라 조직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의 시도 예외가 아니다. 내용과 형식은 늘 새롭게 창조되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당대의 언어 체계나 인식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들이 언제나 새로움을 통해 존재의 근거를 갖게 되듯 강해림 시인도 부단히 그런 위치에 몸을 세운다. 그가 「블랙리스트」를 끌어안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거부, 불순분자, 퇴폐, 조롱과 풍자, 주홍 글씨 등의 시어들은  현실 비판적 시선들이 응집된 것들로 작품 속에서 경동맥의 역할을 한다. 이 시를 통해 강해림의 시가 갖는 정서적 영역이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짜 뉴스」 「놈」 등에서도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예리한 풍자의 촉수를 빛내고 있고, 「슬픈 연대」「고독이 말 걸어왔다」 등에서 역병이 창궐하는 현실에서도 존재에 대한 내밀한 탐색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이 현실과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 덕분에 시는 사회의 부정적 시스템을 고착시키지 않으면서 희귀하면서도 유일무이한 생명체로 살아있는 것이다. 여전히 시는 세계와의 부단한 싸움을 통해 쟁취하는 혈서이다.

 

 

 

강해림 시집 《슬픈 연대》, 시작시인선 036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