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에게
백지가 되려고 너를 만났다. 백지가 되어서 너를 만나고 백지처럼 잊었다. 너를 잊으려고 백지답게 살았다. 백지가 저기 있다. 백지는 여기도 있다. 백지는 어디에나 있는 백지. 그런 백지가 되자고 살고 있는 백지는 백지답게 할 말이 없다. 대체로 없고 한 번씩 있다. 백지가 있다. 백지에서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이 한마디로 그치지 않을 때 두 마디로도 그치지 않고 모자랄 때 모자란 만큼 잠식하는 백지의 운동은 백지를 갉아먹는다. 백지를 지워나간다. 백지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백지의 운동은 점점 더 백지를 떠난다. 백지가 되지 않으려고 너를 만난 것 같다. 백지가 되지 않아서 너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백지는 충분한데 백지는 불충분한 사람을 부른다. 백지는 깨끗한데 백지처럼 깨끗하지 못한 사람을 다시 부른다. 백지는 청소한다. 백지에 낀 백지의 생각을. 백지는 도발한다. 백지처럼 잠든 백지의 짐승을. 으르렁대는 소리도 으르렁대다가 눈빛만 내보내는 소리도 백지는 다 담아준다. 백지가 아니면 담기지 않는 소리를 백지가 담으니까 이렇게도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그걸 다 모아서 백지는 입을 다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백지 한 장이 있다. 너무 소란스러운 가운데 백지 한 장을 찾는다. 백지가 어디로 갔을까? 비어 있다고 백지는 아니다. 백지로 차 있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다. 백지였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를 쓴다. 백지라는 글자를 쓰고 또 잊는다.
《백지에게》, 민음의 시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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