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유리컵에 비 담기/이향란

Beyond 정채원 2023. 10. 9. 01:23

유리컵에 비 담기

 

 이향란

 

 

비울수록 더욱 빛이 나는 곳에

창이 기웃거리며 지나다니는 곳에

오늘은 비를 담는다

 

어제의 예보관 말대로 사방이 주룩거리므로

 

비가 어디서 시작됐든

어느 바람을 만나 키가 자랐든

무엇을 먹고 어떤 생각을 했든

묻지 않기로 한다

 

스며들기 좋아하므로

구름이 투명하게 녹아내렸으므로

 

유리컵 안에 길게 길게 갇히는 비

입을 틀어막고 스스로 굳어가는 비

 

비가 사람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은 비로 흘러들어간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서로에게 젖는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은

비와 비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유리컵 속 비의 풍경이

한 방울 비의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비와 유리는

만나지 않으면서도 계속 깨지지 않는 관계로

맑게 부딪힌다

 

 

 

계간 《문학청춘》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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