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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전前언어적 공간에서 시 쓰기 - 김이듬 론/오민석

Beyond 정채원 2017. 7. 15. 11:19

이달의 시인_평론


전前언어적 공간에서 시 쓰기

‒김이듬 론


오민석



   만일 ‘일반 독자들’이라는 규범적 집단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김이듬의 시를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은 아마도 논리를 파괴하는 단어들의 배열과 그가 망설임 없이 무너뜨리는 금기들을 보며 심히 당황할 것이다. (…) 그리하여 김이듬의 시들이 날리는 훅들과 잽들을 여러 대 얻어맞고 나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써야)하지?’ 사실 이런 질문은 일반 독자만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과 앙가주망engagement을 고집하는 ‘전통적인(?)’ 시인들도 공유하는 것일 수 있다. (…) 왜 이렇게 쓰냐는 물음은 써야할 방식과 컨텐츠를 미리 정해놓고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미리 그려놓은, 수정을 거부하는 지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범주화는 프로이트 이후 만천하에 드러난 무의식의 어두운 세계, 욕망의 복잡한 세계를 감추려는 ‘무의식적’시도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의식과 이성과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며, 욕망과 비일관성과 비결정성의 세계를 마치 부재하는 것처럼 다룬다. 이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빙산의 아랫부분을 지우는 것이므로 폭력이다. (…)


   대부분의 시인들이 상징계the symbolic에서 헤맬 때, 김이듬은 전前언어적pre-linguistic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상징계가 규범과 관습과 검열이라는 ‘아버지의 법칙Father's law에 의해 두들겨 맞은, 잘 길들여진 공간이라면, 크리스테바J. Kristeva에 의해 “기호계the Semiotic"라 명명되는 전언어적 공간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사유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은 에고ego와 수퍼에고superego의 검열에 의해 억압당한 에너지들의 주거지이고, 아직 한 번도 억압을 경험하지 않은 욕망들이 다가올 거세 위협에 맞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언어적 공간이 수행하는 것은 규범 언어에 구멍을 내고, 관습과 전통을 조롱하며, 전복의 기회를 시시탐탐 노리는 것이다. (…)


   김이듬의 근작시들은 여전히 파편적 서사narrative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파편적 현실에 파편적 언어로 응수한다. 거의 모든 시들이 서사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서사들은 계속해서 단절되는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그의 서사는 이야기 아닌 이야기이다. 그의 서사가 계속 끊어지는 이유는 그가 세계의 일관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기계적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분열증 환자처럼 쪼개져 있고 떨어져 있으며, 응집의 순간 해체된다. 그것은 마치 잘린 머리에서 계속 다른 머리가 자라나는 히드라Hydra처럼, 들뢰즈의 리좀rhizome처럼,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 끊임없이 변용된다. 김이듬의 시들은 이렇게 파편화된 세계에 던지는 분열된 질문들이다.(…)



마카롱


김이듬

 


한창 차를 몰아 달리고 있었다

더 밟아, 눈과 입술이 새빨갛게 부은 언니가 말했다

어디 가는데? 대체 왜 이러냐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끄러운 도로에 백합 같은 짐승이 죽어있었다

 

유턴하지 않으면 시간의 빙판 너머 가는 수가 있다

최소한은 천천히 멈추거나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다

새는 울지 않고 날아갔다 

우리는 큰 하수구가 있는 갓길에 앉아

나는 하늘을 보고 바닥은 언니가 보았다

 

저기 시체가 있어, 언니가 하수구 아래를 가리켰다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서 비춰보았다 

놀란 눈으로 검은 웅덩이를 보았다

우리는 반 토막 시신도 목격할 수 없었고 

진흙더미에 고인 폐수도 달빛처럼 마를 것을 알았다

 

나는 차를 몰고 오며 이 천만 원을 고민했고

라디오 주파수를 못 잡는 언니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백단향 파는 데를 아니?

그게 뭔데? 뭐에 쓰려고? 

사소한 얘기로 시작했지만 사회 문제로 흘렀고

별생각 없이 펼쳤는데 모든 페이지가 끔찍한 스토리였다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급하게 멈출 거면서 발끝까지 뿌려지던 눈발과

미세먼지처럼 스며들던 기분 나쁜 음악이나 말하지 않는 공포

그러나 울고 난 이후의 표정이 좋았다

 

새하얀 코트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녀가 잠들었다

깃털 속에 부리를 처박은 닭처럼 

내 우정이 날개처럼 퇴화하여서 날아오르게 할 수는 없지만 마른 목을 감쌀 수는 있겠지

바닐라 색 우주선을 탔다고 상상했다

우주선이라도 내가 몰아야 했고 그것은 이미 내 혀에 생겼다


 

                                                     〈릿터Littor〉 2016년 가을호



(…) 세상에, “백합 같은 짐승”의 죽음이라니, “마카롱”처럼 달콤해 보이는 세계의 “모든 페이지가 끔찍한 스토리”였다니, 매우 이질적인 것들이 마치 오래된 짝처럼 붙어 있는 것이 분열된 세계의 모습이고 분열된 주체의 내면이다.


(…) 세계는 마치 무한히 열려 있으나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상징계 같다. 그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름 아닌 ‘시’의 세계에서 전언어적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직 시에서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 전언어의 공간에서 모든 규범과 문법은 혹독한 의심과 위반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김이듬의 시는 의심과 위반의 언어이다. 그의 “습관은 자유이고 말과 눈물이 말라 처진 젖처럼 처참해도 할 수 없다”(「습기 없는 슬픔」).



『시와표현』 201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