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 남수우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흉터를 간직한 햇살이
따갑게 몸 안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
뒷모습뿐인 액자를 돌려세운다
거울 속에는
하얀 입김으로 떠오른 민낯들이 너무 많았다
2021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남수우 / 1991년 서울 출생, 부산에서 성장. 대학에서 동물생명학을,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
[심사평]
'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좋은 시인으로 살 것이란 믿음 들어
올해부터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하게 돼 심사하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나 경향을 파악하면서 좋은 작품을 선별해갈 수 있었다. 725명의 투고작 3625편을 읽는다는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내면을 읽어내는 일이기도 해서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예년보다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가 강해졌고 상상력도 다소 위축된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고립, 관계의 단절 등을 뚫고 희미한 빛을 찾아 나가려는 고투가 시편마다 절실하게 담겨 있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에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품고 수많은 기록과 증언, 고백과 발언, 노래와 기원들을 공감하며 읽었다. 심사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은 ‘가드닝’ ‘흰 토르소와 천사들의 나날’ ‘인공호수’ ‘에그조프쉬시즘’ ‘서른셋, 생일이 아직 또렷한’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등이었다. 이 여섯 분의 작품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남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무엇을 당선작으로 해도 좋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가드닝’은 간결하고 리드미컬한 언어로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시적 재능과 섬세하고 투명한 감각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 식물적 언어의 세계는 다소 수동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흰 토르소와 천사들의 나날’은 현실의 남루함을 환상으로 감싸며 따뜻하고 환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인상적인 문장이 많지만 세부에 들이는 공력에 비해 전체적 구조나 결말이 약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인공호수’는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의미를 구축해나가는 솜씨가 노련하고 관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듯이 묘사 위주로 전개하다 보니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에그조프쉬시즘’은 원룸에서 일어난 고독사와 애완견을 중심으로 사회적 비극이 어떻게 봉합되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도시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고 있는데, 작품 간의 편차가 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서른셋, 생일이 아직 또렷한’은 운문성과 산문성을 적절히 조율하며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묘사와 진술의 연결이 좀 더 자연스럽고 뒷심이 있으면 좋겠다.
당선작으로 뽑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는 뒷모습과 거울을 둘러싼 사유의 변주가 거울의 안과 밖, 문의 안과 밖, 지구와 태양 등으로 확장되며 몇 겹의 비유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산문적 언어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이 모호함은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미세한 균열의 기억과 무수한 틈을 내장하고 있다. 이 ‘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가 그를 좋은 시인으로 살게 하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당선을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뒷모습” “그 먼 곳을 안으러” 매 순간 떠나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