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건설/김해선 시집
마리 이야기
김해선
바닷가재는 백 년을 산다 우리 할머니는 백한 살까지
살았다 증조할머니는 구십구 세 내 동생은 세살이 못 되
어 죽었다
어제는 음식점에 자리가 없다고 해서 남아 있는 옆자리
를 붙여 열 개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갑자기 날씨
가 추워졌다고 내 둘째 동생만 나왔다
나도 동생처럼 일찍 죽을 거 같아서 어린 무당과 함께
살았다 애기 무당의 숨과 나의 숨이 실처럼 이어져 내가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할머니의 신념이었다 유치원에
다니기 전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붉은 옷과 붉은 가면
을 쓰고 있었다 진짜 귀신이 내게 들어온 걸 몰랐을 때다
큰 접시에 놓여 있는 가재 발톱이 붉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 갈수록 가재 발톱은 점점 붉어진다 아름다운 다홍색
발톱이어야 가격이 비싸다 가재의 발톱에 가느다란 실이
매여 있다 잡아당기자 계속 풀려나온다 어린 시절 붉은 옷
을 입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나를 매달고 있다 순간 단잠에
빠진다 옆집에서 할머니와 동생이 함께 걸어 나온다 둘 다
어린애의 얼굴이다 돌아보면 백 살이다
나는 가재 알처럼 작아져서 수많은 나에게 다닥다닥 붙
어 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나는 내 귀에 구멍을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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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발췌)
좋은 길이 되길! /장철환(문학평론가)
"가재 알"은 "우글거리는 나"의 또 다른 변주다. "나는 가재 알처럼 작아져서 수많은 나에게 다닥다닥 붙어 있다"에서 보듯, '나의 영토'는 "우글거리는 나"의 증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의 특정 사건, 곧 어린 시절 "할머니의 신념"이 야기한 사건에서 비롯하였음을 시는 증언하고 있다. 이는 "한곳으로만 몰려가는 수많은 나"와 "그것은 가계(家系)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증언과도 일맥상통한다. 과거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사건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동생"과 "할머니의 신념"이 만들어 낸 "어린 시절 붉은 옷을 입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나"를 재빠르게 소환한다.
이때 "가재 발톱"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가재 발톱"의 색과 거기에 매달린 "가느다란 실"은 '나-너'의 결속의 기원으로 안내하는 장치가 된다. "어린 무당과 함께 살았다"를 보라. "어린 무당"과의 동거가 단순한 에피소드를 넘어 양자가 '나-너'의 "더블"로 결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무당의 숨과 나의 숨이 실처럼 이어져"는 이를 명시하는데, 「더블」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굴된 바 있다.
(중략)
이처럼 "나"는 '나-너'의 "더블"들의 군집체로 인식되고 있다. 마치 거대한 신경망처럼 "나"와 "너" 사이에는 다양한 갈래의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나"에게로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임을 암시한다.
김해선 시집 《중동 건설》, 파란시선 007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