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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입니까/이귀영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4. 2. 10:05

   아무도 아닌 자

 

   이 시대 바람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온몸 에워싸는 파란은 파란대로 서로 논하지 않았다.

   아무도 아닌 자이므로

   북서풍에 있는 우리의 활공에는 질량과 중력이 허락되

지 않았다.

 

   부리를 한 방향으로

   노을을 휘감아 수많은 시선 앞에 엎드리게 했다.

   갯벌 먹이에 엎드리게 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 우리 멀리

   대오를 짜고 선두를 짜고 결의에 찼으나

   우리의 이름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만지지 않는다.

   아무도 아닌 자이므로

 

   해가 저물어도 붉은 언어

   셀 수 없는 영혼처럼 불의 혀처럼 날아오르는

   울음이나 희망이 순식간에 타오르는 오로라처럼

 

   이 시대 바람에 대항하여 우리는 날고 있는가

   다시 모진 북서풍에 있어도 당신을 향할 것이다.

 

   오직 당신 호흡에 있으므로

   우리의 배경에 있으므로

   우리는 아무도 아닌 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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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중층적 모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향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겉으로는 바로 그 "당신"에 대한 철저한 순종의 결기를 보여준다면, "우리"가 "불의 혀처럼" 날아올라 봐야 오로지 "우리의 배경에 있으므로" 그래서 "아무도 아닌 자"라는 진술은, "우리"(인간)ㅡ신 사이의 관계의 일방성에 대한 부정, 불만, 혹은 불평의 냄새를 풍긴다. 이 시에서는 이렇게 방향이 다른 의지와 정동(情動, affect)이 서로 충돌한다. 이 충돌은 길항의 비대칭적 의미구조를 만들어 내는데, 이런 형용모순이야말로 이 시의 힘이다. 그리고 이런 배리背理야말로 유한성의 옷을 입은 몸ㅡ주체의

일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민석(시인, 문학평론가)

 

 

이귀영 시집, 시작시인선 0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