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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김나영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4. 16. 12:43

    링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링

 

   나는 링 안팍에서 비틀거리는 외롭고 쓸쓸한 복서

 

   땀과 눈물과 비난과 박수와 함성과 백색 공포가 들끓는

 

   네 개의 모서리 안으로 헛꽃이 피고 지고 일그러진 나의

태양이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끝도 시작도 없는 카운트다운이 이명처럼 울리는 곳

 

   죽어 가기 직전까지 피 묻은 펀치를 날려 보렴 그러면 꽃

이라도 흑흑 던져 주지

 

   짓무른 눈빛 수천만 번의 스윙을 받아먹고 사는 곳

 

   멀리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관棺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를 위한 시퀀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피어싱도 아닌 문장이 내 혀끝에 달라붙어 있지만 나는 곧 아무렇지가 않다 아무렇지가 않다 혀끝에 도돌도돌 맴도는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주술처럼 반복되는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내 혀가 되어 가는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최근 나는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꿈을 꿨을 뿐이다 여행 가방을 잃어버리는 꿈을 연거푸 꿨을 뿐이다 해몽을 보고 조금 우울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아무렇지 않게 된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라는 문장이 내 우울을 잡아먹고 공포를 잡아먹고 나는 곧 아무렇지가 않아진다 나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하루하루가 아무렇지가 않아진다 꿈은 꿈이야 꿈쯤이야 이를 꽉 물면 너끈하게 잊어버릴 수 있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정말로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은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나는 아무렇지가 않다

 

 

 

김나영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시작시인선 0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