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식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이영란 시집

Beyond 정채원 2022. 3. 7. 09:00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

 

 

기슭에서 출발한 수영은

반드시 기슭을 잡는다

어제는 두 곳의 장례식과

한 개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모두 반복했고 닮은 꼴이었다

 

닮지 않은 날이

기쁜 날이었다

 

나날이 건너다니는 징검다리는

첫돌과 마지막 돌이 감쪽같이 닮았지만

우리는 젊을 때 가졌던 결의와 다짐을

어디선가 물에 빠뜨려 잃어버렸다

그때 잃어버린 계율이 떠오르고

일정한 몇 개의 패턴들처럼 물은 흘러간다

 

어제와 내일은 얼굴도 없이

슬그머니 도둑같이 다녀가지만

혹은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은

영락없이 사고 여객기처럼 길게 연기를 날리며

불온한 기억의 숲 너머로 사라지곤 한다

 

제일 많이 닮은 것은

맑은 날의 하늘과 흐린 날의 지붕들

닮은꼴로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반복을 위해

남자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닮은 날들이 나를 지우고 갔다

그래도 세상은 나름 친절하였다

갑자기 늙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서로 닮은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 수 없는 기슭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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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에서 화자의 "결의와 다짐"이 살면서 지켜야 할 어떤 도덕적 지향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젊은 시절 자기 나름의 고유한 삶의 형식을 지향하려는 다짐이자 결의이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다짐과 결의를 흐르는 강물에 빠뜨려 되찾을 수 없는 물건처럼 "잃어버렸다." 그 이후로 세상과 우리 모두는 "일정한 몇 개의 패턴들처럼" 고정된 형태로 반복될 뿐이다. '집안을 지켜달라고 기와에 도깨비 얼굴을 새겨 지붕마루 높은 곳에, 하늘을 바라보게 얹어놓은 망와의 귀면'(최명희 《혼불》)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틈입하는 불행과 고통의 순간들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그 귀면의 형상처럼 낯설고 두려운 모습처럼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들을 겪는 인간의 삶의 모습도 역시 정형화된 양식의 무늬를 닮아 있다.(해설에서 발췌)

 

                                                                                                                강웅식 문학평론가 

 

 

이영란 시집 《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 서정시학 시인선 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