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백飛白/오탁번 시집
비백飛白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깐깐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
호젓하다
사람 사는 일 다 이러루하니
윤여정이 오스카상을 받고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연기할 뿐
상 받았다고 윤여정이 김여정 되나요?
기자가 손들고 일어서려고 하니까
-그냥 앉아요 내가 대통령도 아닌데 뭘!
호호 웃으며 화이트 와인 홀짝!
티브이 보면서
윤여정에게 완전 넘어갔다
눈썹까지 살살 간질이는
말의 숨결을 보면
윤여정이야말로 진짜 시인이다
내 처보다 한 살 위 1947년생이라니
움처형으로나 삼아
와인 잔 쟁그랑 맞대면서
이 풍진 세상 허허 웃어 볼까나
사람 사는 일 다 이러루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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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집 『비백飛白』은 천진성의 시학과 비근대 시법에 의해 발원된 것으로서 그야말로 순은(純銀)이 빛나는 아침으로부터 뉘엿하게 기울어가는 해거름까지 지내온 순수 회귀의 미학을 미덥게 펼쳐간 사례로 남을 것이다. 때로 '방울-울타리'의 고요함으로, 때로 '창-수레'의 역동성으로, 천천히 낡아가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을 온 정성으로 기록해가는 '시간의 필경사'로서, 오탁번 시인은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을 예시하는 역설의 시학을 한없이 지속해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과 마음의 고고학을 하염없이 들려줄 것이다.
ㅡ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오탁번 시집 『비백飛白』 ,2022년 4월 문학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