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판도라와 언박싱 중독자/김광호

Beyond 정채원 2022. 10. 3. 13:42

 

판도라와 언박싱 중독자

   김광호

 

 

   딩동.

 

   금단의 상자가 도착했습니다

 

   후생에서도

   판도라는

   언박싱 중독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를 희대의 쌍년으로 만든 배후는 누구인가

 

   희대의 쌍년이라는 유전을 세상에 퍼트린 자

   난 좀 알아야겠어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아

   언박싱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

 

   매일  정체불명의 상자가  도착한다  작고 어두운 원룸에  들어

오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상자를 던져두었다 금단의 상자가 방의

밤만큼  쌓여 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자에 대한

생각을 지우는 일 또는 TV 틀어 놓기 또는 층간소음 유발하기 그

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약 먹고 잠들기

 

   나의 일과가 잘 박싱된 방

 

   이 방은 누구나에 의해 접어진 상자 같다 누군가에 의해  배달

되는 상자 같다(문을 열고 나가면 들어올 때와 다른 시공간이 나

온다) 혹시  이 방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나는 그 상자 안에  있는

죄악 중에 하나 죽음이나 죄, 질투 그런 것들의 원형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배달되고 있는 중

 

  새벽에

 

   술 취한 옆집 누나가 내 방의 비밀번호 키를 누른다

 

   누나,

 

   나는 누나가 꼭 내 방의 비밀번호를 맞추기 바라

 

   여기 유일한 희망이 생겼고

 

   마음을 열었을 때

 

   희망이

   가장 무거운 원죄였다는 걸

 

   왜 숨겼나이까

 

   희망은

   커터칼

 

   매일 배달되는 금단의 상자를

   개봉하는 도구

 

   언박싱 우울

   언박싱 퇴폐

   언박싱 담배

 

   그중에서 가장 양호한 제품들을 골라

 

   어제 너의 주소로 부쳤어

 

   딩동.

 

 

 

 

《문학사상》600호 기념 특집 시

 

김광호 · 2020년 《문학사상》에서 「빛의 보존법」외 6편의 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