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와 언박싱 중독자/김광호
판도라와 언박싱 중독자
김광호
딩동.
금단의 상자가 도착했습니다
후생에서도
판도라는
언박싱 중독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를 희대의 쌍년으로 만든 배후는 누구인가
희대의 쌍년이라는 유전을 세상에 퍼트린 자
난 좀 알아야겠어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아
언박싱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
매일 정체불명의 상자가 도착한다 작고 어두운 원룸에 들어
오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상자를 던져두었다 금단의 상자가 방의
밤만큼 쌓여 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자에 대한
생각을 지우는 일 또는 TV 틀어 놓기 또는 층간소음 유발하기 그
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약 먹고 잠들기
나의 일과가 잘 박싱된 방
이 방은 누구나에 의해 접어진 상자 같다 누군가에 의해 배달
되는 상자 같다(문을 열고 나가면 들어올 때와 다른 시공간이 나
온다) 혹시 이 방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나는 그 상자 안에 있는
죄악 중에 하나 죽음이나 죄, 질투 그런 것들의 원형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배달되고 있는 중
새벽에
술 취한 옆집 누나가 내 방의 비밀번호 키를 누른다
누나,
나는 누나가 꼭 내 방의 비밀번호를 맞추기 바라
여기 유일한 희망이 생겼고
마음을 열었을 때
희망이
가장 무거운 원죄였다는 걸
왜 숨겼나이까
희망은
커터칼
매일 배달되는 금단의 상자를
개봉하는 도구
언박싱 우울
언박싱 퇴폐
언박싱 담배
그중에서 가장 양호한 제품들을 골라
어제 너의 주소로 부쳤어
딩동.
《문학사상》600호 기념 특집 시
김광호 · 2020년 《문학사상》에서 「빛의 보존법」외 6편의 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