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식

인간 사슬/최규리 시집

Beyond 정채원 2022. 12. 26. 00:42

 

 

온기의 발생

 

양지를 찾고 있었죠

멀어진 봄과 오해를 파고

죽었다던 이해의 골방에 누워

흙을 덮자

감정의 겹을 열어 우리의 밤을 폭로하자

귀를 막고 휘청일 때

무엇이든 열리는 순간을 기다리자

견디고 버틴 시간은 별이 되었으니

오래도록 희미했다고 없는 것은 아니듯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몇 번이고 되돌아와야 길이 선명해질 테니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뿌리를 지나가는 물의 대화를

애써 끌어오지 말아야지

떨어지는 꽃잎에도 시절이 있었으니

낮은 곳에 피었다고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듯이

먼 곳에서 온 꽃이다

밀어냈던 밤들은 오라

이제 흔들리지 않아도 향기는 얼마나 가까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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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에 '온기의 발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열리는 순간을 기다리"는 데에서 비롯된다. "희미했다고 없는 것은 아니듯이" 인간 세계가 이렇게 폭력적이고 절단되고 분산된 것 또한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한 순간만이라도 "공기 중에 떠도는 수증기처럼/건조한 세상을 축축하게 하는 착한 미래가" 되자는 제안이 이 시집에는 가라앉아 있다.

 

   그렇게 "흘러 다니는 동안 문제가 발생"할지라도, 우선은 그 우연을 믿어 보자. 뿌리 없이, 리좀으로 세계에 항거해보자. 그렇다면 당신 또한 누군가에게 우연히 "먼 곳에서 온 꽃"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흔들리지 않아도 향기는 얼마나 가까운지'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작은 구원"을 믿는다.

 

                                                                                                 

 

해설 「우리 앞에 작은 구원; 액체성 인간-되기」 중에서 발췌

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최규리 시집 《인간 사슬》, 시작시인선 0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