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시화/강인한 비평집
2부 말의 몸짓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운 고통
강 인 한
가족과 함께 서래봉 오르기 위해
정읍시 내장동으로 들어가는 도중
길 가운데 놓인 방역분사기를 지나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마스크 쓴 소들이
가축우리에 갇힌 축산농민을 끌고 나와
커다란 트럭의 짐칸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굽이 심하게 갈라진 채
피가 질질 흐르는 돼지들이 꿀꿀거리면서
비쩍 마른 아이와 노인들을
깊이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자
살아도 죽은 목숨, 죽여라 죽여
동학농민군처럼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
트랙터 몰고 나와 전봉준처럼 누런 보리밭을
갈아엎는 남자들
어둠이 검은 것은 슬픔 때문이다
탈레반 모자를 쓴 소년들이
부르카 입은 소녀들의 손을 끌어
이어달리기하듯 들어간 숲 속
축제 벌이듯
푸드득 푸드득 날아다니는 닭과 오리들
당황한 관계당국에서는 휴교령을 내리고
방역을 더욱 강화했지만
먼 조상이 난생이었으며
초식동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불출봉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내장산을 뒤돌아 내려오는 유월
— 고성만, 「구제역」(『창작과비평』2010, 겨울호)
일찍이 이런 재앙이 없었다. 산목숨을 끊어도 차마 이렇듯 참혹할 수가 없었다.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몇 해 전의 기억을 더듬어 썼으리라. 이 시가 실린 잡지가 서점에 나온 게 지난해 11월 25일 무렵. 시인은 앞으로 이런 상황이 전개되리라고 예상한 것은 아닐 테지만 2011년 1월말 현재 이 시는 예언 이상의 무서운 압력으로 우리에게 직핍해 온다.
구제역(口蹄疫).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것은 지난해 11월 29일, 안동의 한 양돈농가에서였다. 그로부터 두 달 만에 전국 7개 시도(경북, 인천, 경기, 강원, 충북, 충남, 대구)로 확대,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처분된 가축만 230여만 마리, 피해액은 2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방역현장에 투입된 공무원만 하루에 7천여 명, 그 중 5명은 계속되는 강행군에 목숨까지 잃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 봄, 파주에서 발생한 구제역을 20일 만에 종식시켜, 세계에서 구제역을 가장 성공적으로 진압한 모범국가로 인정받기도 했었다. 그 당시 농수산장관은 "새벽 2시에 국방장관 공관으로 전화해 발생 지역에 대한 출입통제를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군이 새벽 4시쯤 동원됐다"고 회고했다. 구제역처럼 전파력이 강한 질병의 방역에는 분초를 다투므로 군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살처분으로 피해를 보게 되는 농가에는 농민들이 깜짝 놀랄 만큼 파격적인 보상을 해줘라. 그래야 그들의 협조를 얻어내기가 쉬워진다. 구제역 발생 지역의 엄격한 출입통제를 위해서는 즉시 군을 동원해 도움을 받아라.” 라는 대통령의 지시는 신속하게 이행되었고 소, 돼지 2천여 마리의 희생으로 사태는 끝났다. 구제역 발생 20일 만이었다. 그런데 10년 전과 오늘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 시에서는 축산농민과 소, 돼지의 위치가 전복돼 나타나 있다. 마스크를 쓴 소들이 우리에 갇힌 농민들을 끌고 나와 트럭의 짐칸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장면. 어디서 봤더라, 이런 장면을…. 아, 그건 1980년 5월 광주에서 본 그 장면 아닌가. “어둠이 검은 것은 슬픔 때문이다”라는 경구(警句)가 검은 상복처럼 낮게 깔리고, 다시 장면은 비록 비유의 몸을 입고 있으나 이라크 전쟁 혹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진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살해의 연속. 깊이 파헤친 흙구덩이 속으로 한꺼번에 몰려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돼지들, 허우적거리는 돼지들의 모습, 그게 오늘 우리들의 다른 모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렇게 묻는다.
누가 보낸 꽃일까
무슨 일로 사람들 모여든 걸까
내 영혼은 어리둥절 영안실 복도를 서성거리고
밖에는 비가 오는지
막 벌어지던 꽃망울이 떨어지고
달려가던 트럭이 미끄러지고
유리창이 화염병처럼 깨지기도 하겠지
애인에게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 받은 남자가
빈소의 편육접시를 뒤적거릴 때
그가 내뿜는 담배연기가 허공 속에
동그라미가 되었다가 표정들을 천천히 지울 때
죽은 새의 부리처럼 검은 보랏빛
땅속에 나는 백 년쯤 더 누워 있을 거야
입술이 지워지고 귀에서 떡잎이 돋을 때
밖에는 수만 번 비가 내리고
어디선가 또 풋과일이 떨어지고
새들은 내 가슴이 있던 자리를 종종거리겠지
꽃바구니를 들고 지하계단을 막 오르려던
물방울 원피스의 여인이 우산을 접는 행인에게 묻겠지
밖에는 비가 오나요?
— 정채원, 「밖에는 비가 오나요」(『서정시학』2010, 겨울호)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우리는 죽음에 맞닥뜨릴 때까지 갈등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죽음들은 항상 남의 이야기였으며 어쩌다가 마주친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 문득 진한 슬픔을 느낀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고 그 순간 21그램의 체중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게 영혼의 과학적 존재이며 무게라는 것.
스무 해 전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원제는 귀신 혹은 유령이라는 ‘Ghost'였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남자는 강도의 습격을 받고 여자를 지키려다 총에 맞아 쓰러진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자기 육신과 사랑하는 여자의 오열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죽었음을 한참 만에 깨닫는다. 남자의 영혼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울고 있는 여자가 왜 우는지를 모른다. 말하자면 영혼은 자기 육신의 죽음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서도 첫 연은 비슷한 장면으로 보인다. 영화와 다른 점은 이 시에서 ‘나’는 여성이라는 것.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들고 꽃이 배달되어 오기도 하고 영안실 주변이 어수선하다. 어쩌면 그 시각 밖에는 비가 오고 있을까.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통보 받은 남자는 빈소의 음식을 뒤적이기도 하고 담배연기 속에 슬픔의 표정을 지우고 있을 때, 나는 땅속에 백 년쯤 더 누워 있고 싶다. 물방울 원피스를 입은 한 여인이 꽃바구니를 들고 빈소에 조문 오는 길에 우산을 접는 행인에게 묻는다. “밖에는 비가 오나요?” 그 원피스 여인은 먼 후생의 나일는지도 모른다.
땅속에 누워 백 년쯤 세월이 지나면, 내 입술도 사라지고 내 귀에서는 나무의 떡잎이 돋아나고 수만 번 지상에는 비가 내리고 귀여운 새들은 내 가슴의 흙을 밟고 종종거리겠지. 어디선가 또 예사롭게 풋과일이 떨어지고.
죽음에 얽힌 여러 가지 철학적 사유라든가 구차한 감정을 모두 배제한 채로 단지 죽음을 맞는 영혼만을 깔끔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과 지상에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 마치 셀로판지에 싸인 한 묶음의 꽃다발처럼, 그 꽃다발에 뿌려지는 빗발처럼 싸한 시이다.
—《시안》 2011년 봄호
강인한 비평집 《백록시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