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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허수경 시집

Beyond 정채원 2023. 11. 1. 02:16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
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
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것들,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
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
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
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
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
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내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
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가을 저녁과 밤 사이


   옥수수밭으로 해는 졌네 불그스레한 공기 속에 스
며든 그 무엇,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
았네 노을 속에서 나무는 붉은 운명의 운동을 멈추었
네 사기당한 사람의 통장 속 날아가는 마지막 지폐
흐린 손수건을 흔들며 이 세계 흐르지 않는 물속으로
빈 통장은 가라앉았네


   돌이킬 수 없는 짠 사랑의 보리굴비를 가을물에 밥
말아 먹다가 한 사람 울었네 눈물 많은 이의 지문 너
무 자주 들여다본 편지는 사라지네 골목에는 아무 일
없어 언제나 같은 노래만 흘러나왔네 모두들 오늘 하
루를 사랑하며 잠이라는 짐승의 숨 속으로 들어갔네


   그 숨 속에서 누군가 너를 구워 먹었네 맛이 짜다,
하여 서기는 요리서에다 갈빛 가을 음식으로 너, 라
는 고기를 적었네 먼 강물에서 흙맛이 나는 물고기는
피리를 불다가 돌 속으로 숨었네 어떤 이는 날 사랑
하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그런 걸 믿느냐고 물었네


   사랑이 무어냐?


   당신을 두고 가는 거라고 대답했을 때 아, 우리는 멍
들었네 이런 간단한 답은 이 가을을 매장한 삽만이 알 
수 있었네 시체를 부검하는 칼은 초승달처럼 섬뜩하게
도 가늘었네 




너 없이 희망과 함께


   너는 왔고 이 세기의 어느 비닐영혼인 나는 말한다,
빌딩 유리 벽면은 낮이면 소금사막처럼 희고 밤이면
소금이 든 입처럼 침묵했다 심장의 지도로 위장한 스
카이라인 위로 식욕을 잃어버린 바람은 날아갔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모든 비닐영혼은 말한다, 너 
없이 나는 찻집에 앉아 일금 3유로 20센트의 희망 한
잔을 마셨다, 구겨진 비닐영혼은 나부꼈다, 축축한 반
쯤의 태양 속으로


   너는 왔는데도 없구나, 새롭고도 낡은 세계 속으로
나는 이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잃었고 아버지의 기일
에 돋는 태양은 너무나 무서웠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비닐영혼은 말한다, 네 손에서
는 손금이 비처럼 내렸지 네가 왔을 때 왜 나는 그 때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손가락 관절 마디마다 돌아드
는 그림자로 저 완강한 손금비를 후려치지 않았을까


   너는 왔고 이 세기에 생존한 비닐영혼은 손금에서 내
리는 비를 피하려 우산을 편다 너, 없이 희망이여 몇백
년 동안 되풀이된 항의였던 희망이여 비닐영혼은 억울하
다,


   너, 없이 희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