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샤를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독자에게
어리석음, 과오, 죄악, 인색이
우리네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들볶으니,
우리는 친절한 뉘우침을 기른다,
거지들이 저들의 몸에 이를 기르듯.
우리의 죄는 끈덕지고 후회는 무르다,
우리는 참회의 값을 톡톡히 받고
희희낙락 진창길로 되돌아온다,
비열한 눈물로 때가 말끔히 씻기기나 한 듯이.
악의 베갯머리에는 사탄 트리스메지스트,
우리의 홀린 넋을 추근추근 흔들어 재우니,
우리네 의지라는 귀한 금속은
이 유식한 화학자의 손에서 감쪽같이 증발한다.
줄을 잡고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저 악마!
역겨운 것에서도 우리는 매혹을 찾아내어,
날마다 지옥을 향해 한 걸음씩 내려간다,
두려운 줄도 모르고, 악취 풍기는 어둠을 건너.
고릿적 갈보의 부대끼고 남은 젖가슴을
핥고 빨아대는 가난한 탕아처럼,
우리는 길목에서 은밀한 쾌락을 훔쳐
말라붙은 귤을 짜듯 자못 힘차게 쥐어짠다.
빈틈없이 우글우글, 백만 마리 회충 같은
마귀의 무리, 우리의 뇌수에서 잔치판을 벌이고,
우리가 숨을 쉬면, 보이지 않는 강물
죽음이 허파 속으로 소리 죽여 투덜대며 흘러내린다.
강간, 독약, 비수, 방화, 그것들이
우리네 한심한 운명의 진부한 캔버스를
그 유쾌한 그림으로 아직도 수놓지 않았다면,
그건, 오호라!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담대하지 못하기 때문.
그러나 승냥이, 표범, 사냥개,
원숭이, 전갈, 독수리, 뱀,
우리네 악덕의 추접한 동물원에서
짖어대고 으르대고 투그리고 기어다니는 저 괴물들 가운데,
가장 추악하고, 가장 악랄하고, 가장 더러운 놈이 하나 있다!
이렇다 할 몸짓도 없이 야단스러운 고함소리도 없이,
지구를 거뜬히 산산조각 박살내고,
하품 한 번에 온 세상을 삼킬지니.
그놈이 바로 권태! ㅡ 눈에는 본의 아닌 눈물 머금고,
물담뱃대 피워대며 단두대를 꿈꾼다.
그대는 알고 있지,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ㅡ 위선자 독자여, ㅡ 내 동류, ㅡ 내 형제여!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1861년 텍스트]
옮긴이 황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