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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저녁/김경성 시집

Beyond 정채원 2023. 12. 17. 23:49

 

다정한 연인

 

 

세상의 모든 골목은 닮아 있다

 

옆구리에 끼고 가는 골목은 애인 같아서 이따금

무릎 같은 계단에 앉아 쉬었다 가기도 하고

 

제가 나무인 줄 알고

전단지를 이파리처럼 흔들어대는 전봇대까지도 다정해서

늘 그날인 것처럼

고백 못하는 내 안의 상처나 슬픔까지도 다 받아준다

 

반쯤 접혀서 잘 보이지 않았던 길을 오고 갔던 사람들은

지금 어느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까

 

이따금 밥냄새가  작은 창문을 빠져나와 골목 안쪽까지 배부르게 하고

나는 봄밤에 울컥울컥 피어나는 매화처럼 이파리 한 장 없이도

멀리 아주 멀리 향기 보내는 법을 배운다

 

골목에서 자라고 익어갔던 사람들이

먼 곳에서 불쑥 찾아와서

제 안의 숨은 그림을 찾아 퍼즐을 맞추며

어떤 조각은 생각하지 말자고 눈 속에 비치는 제 얼굴을 바라본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채로 그 자리에서 늙어가는 골목,

깊숙이 간직했던 시간이 여기에 다 있다고

나무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린다

 

달아나고 싶어서 가장 멀리 가는 버스를 탔어도

끝내 되돌아오게 만드는

다정한 연인의 끌림

 

 

 

 

김경성 시집 《모란의 골목》, 시인동네 시인선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