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하우스/현대시학
메두사의 아름다움
김연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었다
낮이 끝나고 밤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누가 당신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가
당신은 파란 가운으로 머리를 가린
성 처녀가 아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메신저처럼
어떤 성운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별처럼
영원히 새로 태어났다
사라져 가는 형식을 지니고
당신은 현재에만 그 윤곽을 드러낸다
한밤의 항구 냄새를 담은 머리칼
불로 달궈놓은 글자처럼
피와 뼈에 새겨진 이름
그 먼 곳이 당신을 지나 나에게 도달한다
모래 위에 부는 바람처럼 우리는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당신의 복부에 자리 잡은 노래들
당신의 잠꼬대는 내 꿈에서 나온다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하는 당신의 피
그 피로 날개 달린 말을 낳고
하루에 수만 가지로 모습이 변해도
인간성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
당신의 변신
당신을 알아보는 그 순간에
현기증이 날 만큼 아득한
깊이에서
나를 잡아먹는 눈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당신은 모든 이름을 빨아들인다
과거도 녹고 미래도 녹는 여기
누가 당신을 위해
날마다 새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녹색 화장을 하고 별의 망토로 얼굴을 가린 채
당신은 상스러운 단어를 콕콕 찔러댔다
천 개의 금빛 머리카락이
잘린 머리통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변명
정채원
옆구리를 들킬까 늘 조마조마했어요
고열로 앓고 나면
꽃이 툭툭 피어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 상처가 움직이더라구요
뭐라 말을 하듯 입술이 씰룩거리듯
그러나 소리는 없었어요
어쩜 내 귀에만 들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요
심장이 불타는 사람의 수화처럼
어떤 날은 밤새 숨 가쁘게 움직였어요
모음과 자음이 벌레처럼 기어다녔어요 꿈틀거렸어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상처를 품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요
늘 들킬까 봐 숨기고 다니지만
그래도 믿을 건 그것 밖에 없다는 듯
혼자 있을 땐 가만히
손을 넣어보곤 하지요
아직도 날아가지 못했구나
안심하곤 하지요
어쩌면 자기 귀에만 들리지 않는 말들, 남들은 다 듣고도 모르는 척해주는 걸까요 어떤 이 곁에 가면 그가 분명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웅얼거림이 계속 들려와요 듣지 않으려 해도 또렷이 들려와요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지요
그가 창살로 돌진하다 찢어진 날개로 영영 날아가 버릴까 봐
내 온몸이 상처가 빠져나간 하나의 큰 상처가 돼버릴까 봐
《시인하우스》 2024 상반기, 현대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