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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하우스/현대시학

Beyond 정채원 2024. 5. 21. 22:16

 

 

메두사의 아름다움

 

김연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었다

낮이 끝나고 밤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누가 당신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가

당신은 파란 가운으로 머리를 가린

성 처녀가 아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메신저처럼

어떤 성운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별처럼

영원히 새로 태어났다

사라져 가는 형식을 지니고

당신은 현재에만 그 윤곽을 드러낸다

 

한밤의 항구 냄새를 담은 머리칼

불로 달궈놓은 글자처럼

피와 뼈에 새겨진 이름

그 먼 곳이 당신을 지나 나에게 도달한다

 

모래 위에 부는 바람처럼 우리는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당신의 복부에 자리 잡은 노래들

당신의 잠꼬대는 내 꿈에서 나온다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하는 당신의 피

그 피로 날개 달린 말을 낳고

하루에 수만 가지로 모습이 변해도

인간성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

당신의 변신

 

당신을 알아보는 그 순간에

현기증이 날 만큼 아득한

깊이에서

나를 잡아먹는 눈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당신은 모든 이름을 빨아들인다

 

과거도 녹고 미래도 녹는 여기

누가 당신을 위해

날마다 새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녹색 화장을 하고 별의 망토로 얼굴을 가린 채

당신은 상스러운 단어를 콕콕 찔러댔다

천 개의 금빛 머리카락이

잘린 머리통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변명

 

   정채원

 

 

   옆구리를 들킬까 늘 조마조마했어요

   고열로 앓고 나면

   꽃이 툭툭 피어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 상처가 움직이더라구요

   뭐라 말을 하듯 입술이 씰룩거리듯

   그러나 소리는 없었어요

   어쩜 내 귀에만 들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요

   심장이 불타는 사람의 수화처럼

   어떤 날은 밤새 숨 가쁘게 움직였어요

   모음과 자음이 벌레처럼 기어다녔어요 꿈틀거렸어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상처를 품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요

   늘 들킬까 봐 숨기고 다니지만

   그래도 믿을 건 그것 밖에 없다는 듯

   혼자 있을 땐 가만히

   손을 넣어보곤 하지요

   아직도 날아가지 못했구나

   안심하곤 하지요

 

   어쩌면 자기 귀에만 들리지 않는 말들, 남들은 다 듣고도 모르는 척해주는 걸까요 어떤 이 곁에 가면 그가 분명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웅얼거림이 계속 들려와요 듣지 않으려 해도 또렷이 들려와요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지요

   그가 창살로 돌진하다 찢어진 날개로 영영 날아가 버릴까 봐

   내 온몸이 상처가 빠져나간 하나의 큰 상처가 돼버릴까 봐

 

 

 

《시인하우스》 2024 상반기, 현대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