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식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안주철 시집

Beyond 정채원 2025. 2. 5. 16:05

 

 

 

보르헤스의 시


동그랗게 말린 시를 건네면서
보르헤스는 낭독을 부탁했다

대답 대신
동그랗게 말린 시를 서서히 펴고
시를 바라보았다

라틴어로 쓴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수 없었지만

계속 들여다보아도
긴장이 되거나 관객이 두렵지 않았다

시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모르는 글자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도
관객도
나도 사라졌지만

꽃이 계속해서 자랐다




비가 오겠다


내 가슴에서 출발한 눈물이
당신의 눈에서 쏟아지는데도
나는 모른다

어디까지가 눈물인지

당신의 이마와 당신의 주름과
당신의 쓸쓸한 나이를
나는 세고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내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는
한 마리 구석이 될 때

누군가 나를 손끝부터 머리끝까지
눈물로 오해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듯이

비가 오겠다

외롭다 그립다 쓸쓸하다
이런 말들 밖에서 가만히
세상을 들여다보면

고요와
고요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면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새떼가 되어 날아가듯이

비가 오겠다

셀 수 없는 새떼가 되듯이
다 날아가 사라져도
끊임없이 남겨지듯이

 

 

 

안주철 시집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 문학동네 시인선 142

 

안주철/ 2002년 『창작과비평』 으로 등단.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