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그리운 중력重⼒ /강영은

Beyond 정채원 2025. 4. 8. 18:02

그리운 중력重⼒ 

 

​ 강영은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지막 남은 눈사람처럼 눈 감고 귀 닫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대에게 닿을 순간을 기다리네.

 

​ 나 여기 포근한 함박눈 속에 누워 있으니, 그대 함박눈 속을 다녀가시라.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 목적지⽬的地가 어디든 다녀가시라.

 

​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 녹아내리는 손바닥 위의 눈송이

 

 나, 함박눈 같은 극지에 도착하네.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이 수목한계선에 꽃으로 피네.

 

 

계간 《상상인》 202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