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너머/벼리영 디카시집
디카詩 제49호
오래 묵은 것들의 역공/오민석
임계점이란 말이 있다.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결정적인 지점critical point을 의미한다. 정신의 모든 훈련은 영혼의 임계점을 향해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유사한 것이 오래 반복되고 축적된 후에야 날아오른다. 부엉이가 날아오르는 시간은 아침도 점심도 아니다. 그것은 황혼녘에 날아오른다. 황혼녘은 물이 수증기로, 무지가 지혜로 바뀌는 시간이다. 오래 묵은 시간이 없이 영혼의 부상浮上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벼리영의 디카시들은 수증기나 지혜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긴 시간, 오랜 과정에 주목한다.

열정이 쌓이고 쌓이면
보잘것없는 당신일지라도
어느 순간 작품이 되어 빛난다
―「흔적의 결과」
이 작품은 우선 사진의 아름다운 색깔이 시선을 끈다. 팔레트에 오랜 세월의 습작을 보여주듯 물감이 켜켜이 쌓여 있다. 자세히 보면 물감들은 제멋대로 섞여 있지 않다. 그것들은 유사한 계열에 따라 분류되어 있어서, 이 물감의 사용자가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색깔이 분류 없이 마구 섞이면 칙칙한 검은색이 된다. 화가는 오랜 세월 그림을 그리면서 팔레트에서조차 색깔들 고유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저 무수한 아름다움들이 붓끝에서 캔버스로 옮겨질 때, 새로운 조합의 결정적인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그러나 완성된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시작도 “열정”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어느 순간” 임계점에 이른다. 황혼녘에 부엉이의 날개에 바람이 일 듯, 고통스러운 연습의 무한 반복과 축적 위에서 어느 순간 완성된 “작품”이 빛난다. 벼리영의 관심은 그러나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오랜 과정에 있다. 시인에게 날아오르는 현재의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날아오르기까지의 긴 시간이다. 축적된 시간이 없이 어떤 현재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바삭이는 혈관이라 읽고
나는 아름다운 마무리 중이라 쓴다
―「시니어에 대한 오독」
보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은 배제를 포함한다. 주체가 무엇을 볼 때, 배제와 선택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하여 주체는 보는 것만을 본다. 위 작품엔 똑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들어 있다. 첫 번째 시선은 과정을 배제하고 결과만 선택한다. 그런 시선으로 봤을 때, 위 사진의 피사체는 최후를 맞이하며 “바삭이는” 물체에 불과하다. 그것의 생김새를 유추하여 기껏해야 “혈관”이라 부르긴 하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피돌기가 멈춘 혈관이다. 과정을 배제하고 결과만 선택했을 때, 위 사진에서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두 번째 시선은 결과의 참담함을 배제하고 과정의 유의미함을 선택한다. 첫 번째와 정반대의 선택과 배제를 통하여 두 번째 시선이 읽어내는 것은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두 번째 시선이 포착하는 피사체의 아름다움은 그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낙엽이 되기까지 나무는 새싹의 환희와 여름의 영광과 가을의 죽음을 견뎌왔다. 두 번째 시선이 볼 때, “아름다운 마무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과 경험의 축적 끝에야 비로소 피는 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되 아름다운 죽음이므로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수많은 빗장을 열고 닫았던 나를 붓질한다
흘림체가 되어 버린
울음이 그린 자화상
―「구족화가」
황혼녘에야 날아오르는 부엉이의 원리는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이 작품에서 결과물은 물에 비친 새의 모습이다. 시인은 그것을 새의 “자화상”이라 부른다. 문제는 그런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자화상이 일순간에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나”는 “흘림체”가 되도록 오래 반복된 “울음”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 아름다움이 되기까지 “나”는 “수많은 빗장을 열고 닫”으며 영혼의 훈련을 했다. “나를 붓질한다”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고 그려나가는 정신의 자기 수양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작품에서도 벼리영은 부엉이가 날아오르는 황혼녘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이 되기까지의 오랜 과정을 되짚는다. 그러므로 벼리영의 디카시들에는 두 개의 시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결과로서의 현재와 그것에 이르기까지 과정으로서의 현재완료의 시제이다. 벼리영의 디카시에서 시간은 모두 이렇게 ‘두터운 현재’이다. 그것은 얄팍한 껍데기가 아니라 오랜 역사와 긴 내러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순간의 이미지와 짧은 몇 행의 문자 안에 대상의 ‘길고 오랜 사연’을 압축한다.

뭇사람의 기도로 밝아진 눈입니다
당신을 보며 기원하는데 당신도 나를 보며 소망을 말합니까
땅과 하늘의 기도가 서로에게 닿기를
―「십자가 너머―Beyond the cross」
화자는 “밝아진 눈”을 가지고 있다. 그 눈은 “기원하는” 인간(“나”)을 “보며 소망을 말”하는 신(“당신”)의 모습을 볼 정도로 밝다. 그 눈은 침묵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살아 있는 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시인은 ‘밝아진 눈’이라는 결과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를 가져온 과정이다. 그 눈은 “나”의 노력만으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뭇사람의 기도로 밝아진” 눈이다. 수많은 사람의 기도로 밝아진 눈만이, 침묵하지 않는, 숨어있지 않은 신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어렵고 긴 과정을 통과한 시간만이 황혼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뭇사람”들이 오래 함께 한 기도만이 신의 반응을 만난다. 시인은 “십자가 너머” “땅과 하늘의 기도가 서로에게 닿았기를” 기도하되, 무엇이 그런 성취를 이끌어내는지를 잘 안다. 지혜의 원리는 인간사 내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과의 소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십자가 너머”로 가는 길에도 길고 고된 서사가 존재한다. 시인은 가벼운 결과가 아니라 그 지난한 길에 시선을 둔다.

묵묵히 수행하는 허공이다 급하게 피어나는 꽃,
봉수대 연기처럼 번지는 소리
해일을 감지하며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저 피빛 선 자세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이 작품은 기발한 은유로 시작한다. 시인은 응급 사이렌 스피커들을 “나팔꽃”이라 부른다. 그런데 시인은 은유의 길로도 단번에 넘어가지 않는다. 사이렌 스피커들은 곧바로 나팔꽃이 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묵묵히 수행하는 허공”의 긴 시간을 거친 후에야 나팔꽃이 된다. 벼리영은 현상으로 존재하는 현재가 아니라 현재의 꼬리에 따라 붙어오는 긴 시간에 주목한다. 무엇이든 거저 되는 것은 없다. 나팔꽃 한 송이가 피어나려면 그것에 필요한 복잡미묘한 조건들과 환경이 완벽히 전제되어야 한다. 토양과 양분, 날씨와 햇빛, 수분과 바람의 완전한 조화만이 허공에 한 송이 꽃을 피워 올릴 수 있다. 게다가 누가 꽃이 핀 것을 알겠는가. 핀 꽃에 주목하는 인식 주체에 의해 존재는 비로소 존재감을 얻는다. 시인은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을 현상에 끌어들임으로써 현상을 두꺼운 현실로 만든다. 모든 현상은 이렇게 자신의 서사와 역사로 무겁다. 황혼녘에 날아오른 부엉이가 밝은 대낮처럼 어둠 속을 날아다니듯이, 성취된 지혜는 암흑의 임계점을 넘어 축적된 능력을 발휘한다.“ 해일을 감지하며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저 핏빛 선 자세”를 보라.
누구나 세계를 읽는 자신만의 코드를 가지고 있다. 벼리영은 현상을 현상만으로 읽지 않는다. 그는 현상의 배꼽에서 그것에 영양을 공급하고 그것을 키워온 탯줄을 복원한다. 탯줄을 떼어냈다고 해서 전사前史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전사 없는 역사란 없다. 벼리영은 보이지 않는 역사와 시간과 과정을 다시 보이게 함으로써 얄팍한 현재를 두껍게 만든다.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등단.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 학평론 당선. 시집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외. 문학평론 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외. 시와경계 문학상 외 수상.
[출처] 제49호 오민석/ 오래 묵은 것들의 역공|작성자 dpoem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