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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하연의 「안식일의 정오」감상 / 이원

Beyond 정채원 2013. 6. 3. 15:19

최하연의 「안식일의 정오」감상 / 이원

 

 

안식일의 정오

 

   최하연

 

 

홍단풍의 세계와 붉은 목련의 영토 아래,

까마귀의 심장 하나가 떨어졌다

 

꽃잎 하나 질 때마다

심장은 한 번씩 뛰었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늘 아래 벤치에서 내가 마주친 당신의 눈 속엔 자장가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일어났더니, 무덤 속이었다

 

관을 열면, 내 심장에서 당신의 눈동자까지 삼천 개의 달이 계단마다 놓여 있었다

 

숲이 자라는 소리와 당신이 또각또각 걷는 소리를 들으며

 

떨어지는 꽃잎을 기다렸다

 

불 켜진 창마다 두드려보고 녹슨 난간을 쪼아도 보았지만,

그 깊은 땅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알람을 맞추고 문을 닫았다

 

태양은 늙은 복서처럼 달렸다

 

 

                 —시집『팅커벨 꽃집』(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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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의 감각을 가진 언어 측량사만이 해낼 수 있지요. 이런 정확함이란. 붉음 속으로 떨어지는 검정. 지는 꽃잎과 심장박동 수. 내 심장에서 당신의 눈동자까지는 달이 놓인 계단이 삼천 개. 알람과 문과 태양의 타이밍. 색과 소리와 시간이 놓이는 각각의 자리. 멀리서 서로 닮아 있는 것들. 최저음부에서 들리고 보이는 것들.

   무덤 속 관을 열게 된 언어 측량사의 눈과 귀와 손은 ‘그 깊은 땅속’에서 화상을 입었겠지만요. 이 측량사가 아니었던들 우리가 안식일의 정오, 그 고도에 닿아볼 수 있었을까요. 떨어지는 까마귀와 달리는 태양의 심장. 그리고 숲이 자라는 소리가 나란히 들리는.

 

  이 원 (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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