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시간의 충돌/정숙자
Beyond 정채원
2016. 9. 19. 01:14
시간의 충돌
정숙자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이 있다
천 년 전에 출발한
그 시간은
무수한 시간과 시간 사이를 뚫고 이곳에 왔다
내 곁을 지나는 지금 이 순간도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일 거야
천 년 전 그 시간은 내가 빚었을 수도,
다른 누군가가 보낸 것일지도 몰라
희한한 맛과 모양과 명암이 내재된 시간; 시간들
때론 꽃이거나 바위이거나 살쾡이이거나 달…빛…이지만
어떤 시간도 나를 향해 출발한 이상 무를 수 없지
시간에게 되돌림이란 ‘절대불가’ 아닌가
비켜서 볼까 애쓴들 그 애씀마저도
천 년 전에 출발한 현재일 따름
며칠 전, 투신 자살자가 행인을 덮쳐 2인이 즉사했다…는, 그 어처구니를 설명할 길이란 부재, 우연偶然이라고 밀어붙여도 석연치 않다.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과 시간이 된통 엉킨 거라고 밖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가 보다
천 년을 달려온 속도와 방향이라면
휠 틈도 꺾을 수도 없는 거겠지
감각感覺을 넘어선 그 시간의 실체가 바로
나, 자신의 신체 아닐까?
가령 어느 날 내가 죽었다 해도
나를 통과한 시간만큼은 더 멀리 가고 있을 거야
지구를 벗어난 어딘가로, 수수 광년 밖으로
거기 또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지
『시사사』2016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