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외 2편
그동안
정채원
빛 한 점 없는 심해로 그가 가라앉는 동안
새까만 등에 밝은 오렌지색 무늬가 선명한 송장벌레는
쥐의 사체를 발견하자마자 꽁무니에서 냄새를 뿜고
0도 가까운 심해로 가라앉는 동안
냄새에 끌려온 암컷과 짝짓기를 한다, 사체 옆에서
바람도 파도도 없는 심해로 가라앉는 동안
깨어난 송장벌레 유충들
부드러운 사체의 살점을 먹고 자라고
분노도 후회도 없는 심해로 가라앉는 동안
수백 마리 까마귀가 날아들어
죽은 소의 살점을 완전히 발라내고,
까마귀가 숨겨둔 고깃덩어리는 코요테가 훔쳐 먹고
눈물도 기억도 없는 심해로 가라앉는 동안
알을 낳으려 죽기 살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배부른 곰은 반쯤만 먹다 버리고
드디어 심해 바닥에 가라앉은
그를 향해
돔발상어, 먹장어, 삿갓조개가 몰려들고
우글우글하던 그가 아주 잠잠해지는 동안
100년이 지나는 동안
형형색색 각기 다른 심해에 갇혀 있던 우리가
가만가만 수면으로 떠오르는 그동안
공중 무덤
별들이 만든 먼지의 언어로
스스로 빛을 내는 새들이 있다
등대가 아니지만
어둠 속에 깜빡이는 것
은하 안에는
수천 억 개의 유사 지구가 있다는데,
자기 자신과 1로만 나누어지는
외진 바람에 매달린 새들
필름을 되감기도 전에
카메라 뒷면을 열어버린 날
찰칵 찰칵 귀울음 속에
새들이 날아가 버린 날
현상되지 못한 비행의 기록들 쌓여가는
한낮의 암실
타버린 날개처럼
어제 깎은 손톱이 또 부러지고
검은 네가티브는 새들만 아는 새들의 지문
깊은 산 암벽 위에
목관처럼 매달려 있던 새들
제 날개의 각도와 문양을 지키려
새들은 밤 너머로 떠난 것일까
밀랍의 세계
우린 더 이상 뜨거워지면 안 돼
전신이 흐물흐물해지다
코도 귀도 사라지고
팔다리까지 다 녹아내려
서로의 문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될 거야
눈에서 떨어지는 촛농에
발등이 벌겋게 부어올라
온종일 문쪽만 바라보게 될 거야
두근거리는 가슴을 잠재우고 통증을 잠시 잊게 해주는
기도서의 모서리가 녹는 동안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흥건히 고인 불안도 돌같이 굳혀
종량제 봉투에 담아 암매장하면 된다고
부부젤라처럼 불어대는 소리들
귀를 틀어막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목이 부러지느니 차라리 녹아 없어질 거야
오늘은 손가락 두 마디를 더 녹여
창유리에라도 메모를 남기자
혈서처럼 유언처럼
암매장되는 일기장처럼
신을 본뜬 밀랍인형에
끈적이며 녹아내리는 볼을 비벼댄다
점점 짧아지는 심지로
반쯤 뭉그러진 입술로
함께 녹아가는 손목을 밀봉한다
『시산맥』2016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