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페루/김상미

Beyond 정채원 2016. 11. 24. 21:13

 

 페루

 

       김상미

 

 

 

 

 

 

 

 

 

  다시 태어난다면 페루가 좋겠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멋진 소설도 있듯이

  그곳은 죽기에 딱 좋은 곳.

 

  그동안은 어디든 꼭꼭 숨어 있자.

  큰놈들은 큰놈들끼리 어울려 언제나 잘도 도망치고 도망치다

  북두칠성처럼 어김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갈 곳 없는 작은 놈들을 또 잡아먹고, 잡아먹고…

 

  이제 더는 놀랄 것도 없는 이곳.

  내 아버지가 울고, 내 어머니가 울고,

  내 형제, 내 아들딸들이 우는 이곳.

  그러나 나는 결코 울고 싶지 않은 이곳.

 

  당분간만 이곳에 꼭꼭 숨어 있자.

  모든 새들이 떠나고, 미지의 새들마저 다 떠나고 나면

  간신히 붙잡고 있던 누군가의 마지막 팔을 흔쾌히 놓고

  달콤한 새들의 눈물이 너무나도 그리워 목이 마른 숲의 맥박이

  점점 느려지다 딱 멈출 때까지만.

 

  그 다음엔 재빠르게 침실 서랍장 위에 놓아둔 페루의 사진을 가방에 넣고

  오래전에 내가 묻혀 있던 그곳으로 떠나자.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든 훌쩍 떠나는 방식은 이미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한 은총.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페루가 좋겠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멋진 소설도 있듯이

  페루는 죽기에 딱 좋은 곳.

 

  내가 미치도록 사랑한 한 남자도

  막다른 그 길 위에서 한 번도 내가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처럼

  그렇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웹진 『시인광장』 2016년 11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