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공중뿌리/ 김이듬

Beyond 정채원 2016. 12. 4. 13:42

공중뿌리

 

   김이듬

 

 

 

회오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배꼽에서 나온 녹색 줄기가 매일매일 길어진다

줄기는 펄펄 내가 잠든 사이에 침대를 한 바퀴 돌아 벽에 달라붙었다가 벽을 뚫고 나갔다

메마른 내 몸에서 뻗어나간 것들이 쏟아진 신발 자루의 도취한 낡은 구두처럼

 

나는 줄을 잘랐다 식물이 아니라 축축한 꼬리 같다

방을 예약했다

연차를 내고 일주일을 예약했다

벨보이가 내 무거운 가방을 옮긴다

 

나는 탯줄인지 밧줄인지 모를 줄기로 음식을 나누는 신성한 순간을 만들 수도 있겠다

로프 매듭을 묶어 하늘에 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바위처럼 가만히 앉아 녹색 줄기가 나를 칭칭 감도록 그대로 둔다

내가 끝나고 내가 시작되거나 내게 가까울수록 내가 아닌 건 마찬가지

 

나는 나를 무수히 낳아두고 최대의 공백기를 기다린다

벽에서 자라는 나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창밖으로 내려가는 아이들에게 키스를

슬리퍼로 배를 두드리며 최고의 슬럼프가 갱신되기를

 

룸서비스 되죠? 제철 햇과일이 뭐가 있나요? 그리고 와인 한 잔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할 빚보다 죽을 때까지 죽여야 할 내 끝에 달린 것들

축적된 데이터와 인상학적 연구를 위해 줄을 끌어당겨 본다

내 말단은 한밤중의 묘지와 깊은 낮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또 단숨에 닿아서

 

순번 대기표를 쥐고 이 아이를 어디서 뗄 수 있어요?

나는 식물학자에게 은행 직원에게 호텔 로비에서 만난 태권도장 관장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극빈하게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의 흉내를

납 신발에 바위 배낭을 매고 물속으로 들어간 수많은 이들의 후견인처럼

기대 없는 긴 기도를 한다

고백을 가장한 열정적인 폭로를 하고 폭발 없이도 친화력이 넘치는 나는 혼잣말을 혼자서는 하지 않는다

틴트를 바르고 앉아 소문을 트위터에 퍼트리는 녀석은 나의 다른 몸

비벼주면 들짐승 근육 두뇌가 되는 녀석은 나와 같은 육체

국수를 사러 간 녀석이 돌아오지 않기를 붕붕거리는 꿀벌 작은 모터 하늘에 불타는 깃털구름보다 많은 뿌리들

 

 

 

 

                        —《현대시학》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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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 』,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모든 국적의 친구』『디어 슬로베니아』, 연구서 『한국현대페미니즘 시 연구』.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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