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 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정숙자 시집
시간의 충돌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이 있다
천 년 전에 출발한
그 시간은
무수한 시간과 시간 사이를 뚫고 이곳에 왔다
내 곁을 지나는 지금 이 순간도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일 거야
천 년 전 그 시간은 내가 빚었을 수도,
다른 누군가가 보낸 것일지도 몰라
희한한 맛과 모양과 명암이 내재된 시간; 시간들
때론 꽃이거나 바위이거나 살쾡이이거나 달…빛…이지만
어떤 시간도 나를 향해 출발한 이상 무를 수 없지
시간에게 되돌림이란 '절대 불가'아닌기
비켜서 볼까 애쓴들 그 애씀마저도
천 년 전에 출발한 현재일 따름
며칠 전, 투신 자살자가 행인을 덮쳐 두 명이 즉사했다…는, 그 어처구니를 설명할 길이란 부재,
우연이라고 밀어붙여도 석연치 않다. 천 년 전에 출발한 시간과 시간이 된통 엉킨 거라고밖엔…,
시간에도 관성이 있는가 보다
천 년을 달려온 속도와 방향이라면
휠 틈도 꺾을 수도 없는 거겠지
감각을 넘어선 그 시간의 실체가 바로
나, 자신의 신체 아닐까?
가령 어느 날 내가 죽었다 해도
나를 통과한 시간만큼은 더 멀리 가고 있을 거야
지구를 벗어난 어딘가로, 수수 광년 밖으로
거기 또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지
대상 X
무(無)의 공간
우주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지름 십억 광년의 공간이 있다고 한다
그 많은 별을 품고도
우주마저도
한구석 쓸쓸함이 그렇다 한다
뭇 성단, 행성과 항성, 초신성의 폭발이 모두
거기서 움텄나 보다
여기 태양의 변두리에서 돌로 꼽히든 꽃으로 돌든 울창한 쓸쓸함이야 우주를 닮아 그런 것이었구나
골목마다 다친 바람아
어깨뼈 비벼 운(泣) 곤충들아
캄캄―적막 ―속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숨어 있다지 않니?
우주의 중력이
십억 광년
그 텅 빈 공간에서 움튼― 움트는―파장이라면
우리들 폐부에 뚫린 십억 광년도
힘의 원천이 되지 않겠니?
무질서가 질서인 바에야 모든 기압을 견디자구나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 숨 가쁜
돌멩이야 주사 놔 주마
정숙자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파란시선 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