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후라시 (외 2편)/ 신용목

Beyond 정채원 2017. 8. 5. 09:31

   후라시 (외 2편)

 

      신용목

 

 

 

      동그라미는 왼쪽으로 태어납니까

      오른쪽으로 태어납니까

 

      왼쪽으로 태어난 동그라미의 고향은 오른쪽입니까 어디서부터

      오른쪽은 시작됩니까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는 동그라미의 부모입니까 내가 그린 동그라미는 몇 개입니까

 

      나는 그들에게 죄인입니까

 

      왼쪽으로 걸어갔는데 왜 오른쪽에 도착합니까

      왜 자꾸 동그라미를 그립니까

      동그랗습니까

 

      동그랗습니까

 

      어둠을 뒤쫓던 후라시 불빛이 내 얼굴에 쏟아졌을 때

      나는 유일한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착취당하지

      너는 혼자였고 나는 가난했어

      무엇보다도 우린 젊어서

 

      온통 늙어가지

 

      그러나 어둠은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후라시를 켤 때마다 보란 듯이 불빛 그 바깥에 가 있었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나는 간신히 외치기 시작했어

      비 내리는 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슬픔이 젊기 때문이다

 

      다음 날부터

      태양은 구정물 통에 담긴 접시처럼 유일한 하늘에 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깨뜨릴 수 있는 동그라미와 깨뜨릴 수 없는 동그라미에 대해 생각했지만

      우리가 만났던 밤은 아직 젊었고

 

      어떤 비도 슬픔을 씻기진 못하고

 

      너는 혼자였고 나는 가난했지

 

      동그라미 안으로 쓰윽 들어온 손이 내 턱을 추켜올렸을 때

      내 얼굴은 이미 깨져 있었다

 

 

 

모래시계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검은 사내가 내 목을 잘라 보자기에 담아 간다 낡은 보자기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구멍으로 먼 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날 연인들이 마을에 떨어진 보자기를 주워 구멍으로 검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꼭 한발씩 내 머리를 나눠 딛고서

 

 

 

                    —시집『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2017.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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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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