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내 몸이 집이라면 이사한 다음에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권혁웅
Beyond 정채원
2017. 8. 14. 23:23
내 몸이 집이라면
이사한 다음에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권혁웅
그 집에는 지하실이 아니라고 해도 비밀이 있다
불을 끄면 꼽등이처럼 둥근 기억이 튀어 다닌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이 나 대신
벌 받는 자세로 모여 있다, 다시 보면
펄럭이던 시절의 빨래들이다
고기 구울 적炙,
머리 감을 목沐,
두 글자로 나흘을 버텼다
타는 마음을 흉내 내는 단백질이 이틀, 누설된 얼굴로
다시 이틀,
그리고 주말을 기다려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담았다
그 집에는 다락방이 아니라고 해도 연옥이 있다
방문들이 변성기로구나, 내게로 열릴 때마다
죄다 비명을 지른다
사전에는 '희망' 다음에 '희미'가 있었고
그건 사전의 거의 끝이었다
읽던 책을 소리 나게 덮거나
발을 끌며 걷는 것은 그 집의 관절염 같은 것이었다
콜드크림을 바를 때마다
얼굴에서 미안, 미안, 소리가 나던 엄마와
문주란을 듣던 이모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질서와 규칙만을 알 뿐입니다
칸트가 말했다
칸트의 것은 칸트에게
꼽등이의 것은 꼽등이에게
그 집이 나를 낳았으므로 이제는 내가 가출할 차례였는데
그러나 내 몸이 집이라면
나는 그 집을 버리고 어디로 이사한 것일까
『시와표현』201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