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비정 외 1편/안미옥

Beyond 정채원 2018. 5. 23. 20:01

비정


안미옥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멀어지는 것에서 멀어지면서


너는 작고 분명한 나사를 찾고 있다

나는 크고 뭉툭한 해머를 들고 있다


울고 있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


그것은 빛나고

그것은 무서운 눈


울음 안에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네가 먼저 잠들고, 내가 잠들지 못할 때

불 꺼진 자리에 내가 앉아 있어야 할 때


나는 어둠 속에서

감은 눈을 보고 있다

태어난 이후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의 물건으로 둘러싸여 있는 너는

나의 물건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는


계속해서 반대쪽을 향해 말하고

우리는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겠지


안에서 잠가도 잠기지 않는 말

마음을 정하는 것과 상관없이

어떤 문장은 남는다


네가 울더라도 나는 네 옆에서 잘 수 있어

네가 하는 말이 간혹 들릴 때

나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감꼭지를 자른다


하얀 접시 위에

잘 말린 감을 내어 놓는다




캔들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창비 시집 <온>,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