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네 번째 서랍

고해 (呱咳)/ 장혜령

Beyond 정채원 2019. 4. 17. 20:58



고해 (呱咳)


장혜령


1


사랑하지 않지, 텔레비전을 켜둔 모텔 방

침대 위에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당신은

내 허벅지에 다른 손을 뻗거나

목을 조르며

뒤를 파고들 뿐이지


창밖엔 진눈깨비 흩날리고, 이 골목이

거리거리가

더러운 비닐을 덮고 누운

남자의 살냄새


쇼윈도 앞

쓰레기차가 지나간 자리

누군가 핏빛 오수를

튀기며 걸어가고


저기, 비명처럼

묶어도 새어나오는 것


2


불 켜진 창문이라면

어디든

두드리고 들어가

용서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하수구에는

피우다 버린 담배, 침을 뱉듯 떨어진

나뭇잎들


먼 창 너머

몸을 씻는 사람

쿨렁거리며

누군가의 피와 내장이

발아래로 흘러가는 소리


3


이 방의 거울은

낮게 붙어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베개맡에는

다른 사람이 자고 간 냄새


텔레비전에서는

울부짖는, 흐느끼는, 깔깔거리며

살점을 뜯는 소리


끝나가요, 칼을 든

정육점 여인이 기다리는 손님에게 말하듯

등 뒤의 당신에게


끝나가요

거의, 모든 것이


⸺계간 《창작과 비평》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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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연출 전공)를 졸업.〈EBS 지식채널 e〉작가. 2017년《문학동네》신인상으로 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