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식
파이/김건영 시집
Beyond 정채원
2019. 7. 13. 11:26
덜 떨어진 눈물
김건영
이것은 이유를 모르는 유리다 만난 적 없는 사람과 일
곱 번쯤 작별하고는 알았다 시작한 적도 없는 데 끝만 있
다 미간에 박힌 눈물을 본다 탄생의 이유가 없으니 하강
의 이유도 없는 덜떨어진 눈물이다 한밤중에는 검은 개보
다 흰 개가 무서워진다 골목에 물이 가득 차도 윤곽이 보
인다 누렇게 뜬 달을 보면 거대한 안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 눈의 주인은 밤에만 걷는구나 한낮에는 종이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온몸이 검어진다 이런 것으로 편지
를 쓴다 모든 것을 편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편지는
미래로 가서 과거로 돌아온다
모든 것은 상상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봉해진
말들의 산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실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손바닥에 像想이라고 썼다 구름 속에서 코끼리 떼가 나
타났다 지난밤 우리가 서로를 끌어안았을 때 서로의 유리
체가 스쳐 지나갔다 검은 개와 흰 개가 몸을 포갠 것처럼
새벽이 왔다 비문증에 걸린 두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제
각기 투명해졌다 우리는 서로를 포옹 속에서 통과했다고
믿는다 제 앞으로 걸어가며 눈물이 되어 달 밖으로 빠져나
가려는 사람이었다 행성들의 유격이 눈에 고였다
김건영 시집『파이』, 파란 시선 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