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레이디 다다이스트, 프랑켄적 신체와 변검하는 언어들-정채원론/임지연 평론가

Beyond 정채원 2019. 8. 10. 18:45



레이디 다다이스트,

프랑켄적 신체와 변검(變臉)하는 언어들

정채원론



갈릴레이의 마을에는 누가 살까?

-메리 셸리의 ‘Mrs. 프랑켄슈타인’, 혹은 뒤샹의 ‘다다-각시’


      1818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요청에 따라 연인 ‘Mrs. 프랑켄슈타인’을 완성 했더라면, 그리고 호수 한가운데서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원작의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진 채, ‘빅터 프랑켄슈타인’보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이 서사의 중심에 있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존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헐벗은 호모 사케르적 존재다. 그러나 괴물 프랑켄슈타인보다 더욱 헐벗은 존재가 있다.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없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충분한 존재, ‘Mrs. 프랑켄슈타인’이다. 원작에서 그(녀)는 완성되기는 커녕,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신체(근육과 혈관들이 드러나는 피부, 희미한 눈, 검은 입술)도, 인간과 소통할 수 있었던 언어능력도, 극심한 고독의 감정도, 가족제도 안으로 편입되고자 했던 상징계적 욕망도 가져본 적 없는, 아주 잠깐 가능성으로만 존재했었다. 원작의 기억을 지우면서 번식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서사에서 Mrs. 프랑켄슈타인을 상상해보자. 그(녀)는 어떤 내면을 가지고 어떤 일상에서 머물 수 있을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나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정채원의 첫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시와시학사, 2002)이 삶과 죽음의 경계 설정(「데드 포인트」)이거나 삶 쪽으로 기울어간 (「冥府」를 엿보다) 죽음의 어떤 지점을 맴돌았다면, 두 번째 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민음사, 2008)은 삶의 일상공간에서 실재하는 죽음을 겨냥한다. 이때의 죽음은 삶의 공간을 초월하는 탈일상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세계에서 극렬하게 감지되는 죽음이다. 죽음에의 강렬한 욕망은 삶의 욕망과 연동되며 따라서 죽음을 예민하게 감지할 때만 삶은 의미를 갖는다.

      죽음은 기호도 상징도 알레고리도 아니다. 죽은 신체가 살아 있음, 즉 산 시체 혹은 죽은 산몸에 대한 내면과 감각에 대한 것이다. 죽음의 욕망은 결국 살아 있는 신체의 고통을 겨냥한다. 신체는 일상 안에 거주한다. 정채원의 시는 일상을 벗어나지 않은 채 일상을 기괴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일상 안에 숨겨진 어떤 비(非)일상의 비의를 포착하지도 않는다. 일상과 비일상은 동시적인 것이며, 한 겹인 채로 일상의 세계를 연다. 그것은 괴물 프랑켄슈타인보다 더 비일상 존재인 Mrs. 프랑켄슈타인의 일상세계이며, 자동화된 일상을 전위적으로 파괴하는 “다다각시”의 일상이기도 하다.

      정채원의 시는 신체를 가지지 못한 자의 내부적 시선, 즉 살아있는 죽은 신체에 대한 Mrs. 프랑켄슈타인의 얼굴과, 뒤샹의 예술적 전복에 대한 일상의 실패를 파편화된 언어로 발화하는 “다다각시”의 얼굴을 동시에 보여준다. 20세기 초 다다이스트였던 마르셀 뒤샹의 기획은 미술의 시각적 무관심과, 원본과 복제본의 전도를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하는 것이었다. 정채원 시의 언어는 죽음과 삶을 전도시킨다. 죽은-삶 혹은 산-죽음이라는 세계를 드러내면서 언어의 우연성에 주목한다. 그의 독특한 언어의식은 일상과 비일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들고, 대화와 독백을 넘나든다.



시체보관소 속의 죽은 산 자들


      갈릴레이 마을은 어떤 풍경일까? 24시간 주유기가 돌아가고, 호프집이 있으며, 엘리베이터와 횡단보도가 있는, 일상이 압력밥솥 추처럼 돌아가는 곳이지만, 갈릴레이 마을의 일상은 비일상이 배접된 어떤 풍경이다. 풍경은 슬프도록 기괴한데, 풍경 속 존재들의 비일상성 때문이다. 고스트 댄스를 추는 자(「바람궁전의 기억」). 시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팔을 갖고 있는 자(「부위별로 팝니다」), 아편굴로 가겠다고 중얼거리는 자 (「아편굴로 가겠어요」), 몇 벌이나 더 만들어진 신체를 가진 나(「오늘은 휴관이에요」), 죽어도 죽지 않는 나(「오늘의 운세」), 시체보관소에서 부검받는 자(「자주 부검되는 남자」)들이 사는 갈릴레이의 마을의 일상 이면에는 기괴함이 채색되어 있다. 그것은 풍경의 그로테스크라기보다, 내부의 괴기스런 슬픔에 가깝다. 시적 주체의 괴기스런 신체의식은 타자에게 보여지는 시선의 불일치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은 자기 내부의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신체의 기괴함이다.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시선이 타자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고,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시선은 타자에 의해 보여지는 주체의 시선이라면, Mrs. 프랑켄슈타인의 시선은 자기를 바라보는 주체의 내부적 시선이다.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시선이 외부의 시선들인 반면, Mrs. 프랑켄슈타인의 시선은 타자의 시선을 배제한 오롯한 주체의 시선이다. 정채원 시집에 드러나는 신체성은 신체 외부의 결핍이나 기괴함을 풍경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신체외부의 조건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다. 기괴함이 외부적 그로테스크로 풍경화되지 않는 이유는 주체의 내부에 의해 그려지는 신체성에서 발원되기 때문이다.


나를 잊지 말고 기다려 줘요 수도원 문을 잠그지도 않고 그냥 뛰쳐나왔어요 꼭 돌아갈게요 오늘은 검은 제복을 벗어 던지고 핑크빛 드레스로 갈아입겠어요 검은 옷에 길든 사람에겐 검붉은 핏빛이 더 어울릴까요 당신의 피로, 순결한 당신의 피로...... 나를...... 당신이 나를 몇 벌 더 만들어 놓았잖아요 자꾸 만지작거리면 닳아질까 봐 나는 주점에도 하나, 도서관에도 하나, 유곽에도 하나, 수도원에도 하나, 묘지에도 하나, 나도 나를 다 헤아릴 수 없어요 나도 나를 다 기억해 내지 못해요

                                                                                                                     -「오늘은 휴관이에요」부분


시체 보관소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던 내가 다시 깨어난 건 바로 그때였어요 검시관들이 내 왼쪽 가슴을 메스로 오 센티쯤 그어 내려갔을 때 내가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지요 뭔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검시관들이 절개 부위를 황급히 꿰맸다지요 사망 선고까지 받았던 내가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지요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스포츠센터에서 땀을 흘렸고 십 년 전부터 그토록 즐기던 담배까지 끊었으며 아침마다 명상의 시간까지 지켰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시신으로 빈집에서 발견되었던 이유, 사인은 끝내 규명되지 않았지요

그 후로 이따금 갑자기 쓰러져요 사망 선고를 받고 시체 보관소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다가 결국 또 부검을 받게 되고...... 극심한 통증에 다시 깨어나곤 하죠 비장 속에 갇혀 울부짖다 싸늘하게 식어 가던 표범 꼬리를 검시관들이 어쩌다 베었는지 아니면 두개골 속에 탄환처럼 박혀 화석이 되어 가던 익룡의 발톱이라도 건드렸던 걸까요 이 천 마일을 날아서라도 꼭 돌아오고야 마는 모나크 나비의 오렌지빛 날개들..... 자욱하게 몰려와요

요즘은 더 자주 쓰러져요 쓰러질 때마다 얼굴 윤곽이 조금씩 뭉툭해져요 이제는 위장도 간장도 반쯤 녹아 버렸다지요 다시 부검을 받게 되고 또 깨어나겠지만.......이러다 모든 게 지워지고 나면 어떤 고통도 다시는 나를 깨우지 못할 거예요 아무도 어떤 것도 기억도 없이 투명해진 나를 붙잡진 못할 테지요

                                                                                                                          - 「자주 부검되는 남자」


      신체는 죽음으로 향할 때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언어의 표면에 속지 말자. 죽음은 늘 산자 쪽의 죽음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죽음이며, 삶 한가운데서 부딪히는 죽음이다. 이 죽음이 더 비극적인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도래 때문이다. 가령, 죽은 지도 모른 채 살아 있는 삶이라는 죽음의식(「바람궁전의 기억」), 수천 수만 번 오르락거려야 하는 고통의 반복이라는 삶의식(「그리운 연옥」)은 삶과 죽음의 관계가 연동하면서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죽음이란 삶의 고통을 환기하는 방식이다. (첫 시집에서보다 이번 시집의 경우, 죽음과의 거리가 더 밀착되어 있다.)

      고통의 강도는 죽음을 넘나들 지경이다. “통통하게 살 오른 벌레들이/부패가스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내 두 볼”(「붉은 립스틱을 바른 미라」)에서처럼 죽음을 통과하는 퇴락한 신체성은 물질적 신체의 현상이라기보다 죽지 않는 삶의 고통(“영생을 믿습니까?)을 드러내는 감각의 실재이다. 쓰러질 때마다 얼굴 윤곽이 뭉툭해지고, 위장도 간장도 녹아버린 신체들, 시체보관소에서조차도 통증을 견디지 못해 다시 살아나는 죽은 산 자의 신체들, 그것은 신체적 감각을 통한 고통의 현상학에 관한 정채원의 보고서이다.

      삶은 곧 고통인데, 삶-고통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몇 벌의 신체를 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피로” 만들어진 “나”는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있다. 검붉은 핏빛 드레스에는 지금 막 만들어진 신체에서 묻어나는 피 냄새가 어려 있다. 신체는 닳아질지언정 죽지 않는다. 당신이 나를 몇 벌 더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신체가 “휴관”일 때도 있는데, 이때의 휴관은 안식이며 그러므로 “휴,관”이 된다. 지금 막 만들어진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핏빛 신체가 아니라, 텅 빈 내부에 모래와 소금을 채우고 아마포를 둘둘 감은 미라의 신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될 수 있을까? 몇 벌이나 더 만들어진 Mrs. 프랑켄슈타인의 신체는 끝내 죽을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일상적 삶의 담금질은 끝날 수 있을까? 시체 보관소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레이디 다다의 변검(變臉)의 언어들


      “다다각시”는 정채원의 시를 근원적으로 해명해주는 결정적 언어들 중의 하나이다. ‘다다’란 반예술을 위한 반예술을 외쳤던 20세기 초 예술운동의 하나였는데, 그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원용하면서 자신의 일상적 삶과 예술적 삶을 뒤섞어 놓는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다다이스트가 아니라, ‘레이디 다다이스트’라는 점에 있다. 다다로서의 삶은 일상에 잠식당한 채, 일상의 궤도를 절뚝거리며 돌 뿐이다. 갈릴레이 마을이 슬픈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상의 정체성은 다다이스트가 아니라, 레이디 다다라는 점을 유념할 때 해명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자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한에서, 레이디 다다로 존재한다. 여성의 일상을 그려내면서도 여성적 자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시집 저변으로부터 배어나는 슬픔의 정서를 보다 밀도감 있게 구성한다.


나는 오다가다 마주치는 기계들에 유리컵을 집어 던진다 일정표에 적힌 대로 소리도 없이 번쩍이며 잘도 굴러가는 쳇바퀴들, 꼭 우연의 효과를 염두에 두는 건 아니지만 나는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진다 한번은 샤워를 하다 말고 넥타이를 매고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에게 바가지를 집어 던진 적도 있다 며칠 전엔 밥을 먹다 하마터면 다다에게도 숟가락을 집어 던질 뻔하였다 어느 틈에 기계처럼 밥상머리에서 신문을 읽거나 배가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TV를 건너다보는 다다, 그러나 다다 면상에까지 펄펄 끓는 국그릇을 집어 던지지는 못했다 몇 년 새 다다각시가 다 되어 버린 내가 다다기계 앞을 떠억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다다


                                                                                                                     - 「다다각시」부분


     레디 메이드의 선구자였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들을 참조하는 이 시는 다다조차 전복하려 했으나, 일상에 잠식당한 나머지 실패해야하는어느 “다다각시”의 이야기이다. “변기” “기계” “우연의 효과”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는 뒤샹의 작품인 <샘>이나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를 창조적으로 전유한다. 뒤샹의 작품이 시적 공간의 장소가 되면서, 뒤샹의 다다적 전복은 시의 일상의 평범과 지루함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뒤샹의 작품들은 사물의 도구성을 삭제하면서 오브제를 새롭게 탄생시키거나, 인간조차 기계적 운동을 원리로 하는 미적 사물로 상상하면서 사물의 사물성에 깊게 몰입한다. 변기를 도구성에서 해방시킬 때, 그것은 예술작품이 된다. 용변을 보는 변기에서 새로운 오브제-변기로의 낯선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정채원의 이 시는 뒤샹의 전복된 미적 공간을 일상의 공간으로 재전복한다.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의 기계적이고 사물적인 인간의 움직임이 “넥타이를 매고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라는 일상의 반복적 원리로 변환된다. 일상의 공간으로 전락한 다다적 행위는 “샤워를 하다 말고” “바가지를 집어 던”지는 “다다각시”의 시적 행위를 유발한다. 그것은 전복일 수 있을까? “함께 야반도주”한 “다다”에게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진다”는 “다다각시”의 고백은 다다적인가?

      고백을 계속 들어보자. “그러나 다다 면상에까지 펄펄 끓는 국그릇을 집어던지지는 못했다”는 슬픈 고백. “다다각시가 다 되어버린 나”를 거기서 발견하고 전복은 실패한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는 전복의 행위가 어떠해야 함을 잘 알고 있는 역설적 실패이기 때문에 고백에는 근원적 슬픔이 묻어난다. 일상의 전복조차 일상이 되었을 때 그때의 전복은 무엇일 수 있을까? 그리고 실패를 분명히 아는 자의 실패는 무엇일 수 있을까? 그것은 근원적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모험하는 자의 실패일 것이다. 시집의 표제작에서 “상식의 말뚝에 한쪽 발을 묶고/나머지 한발로 절뚝절뚝/일상의 풀밭을 뱅글뱅글 돌아요”(「슬픈 갈릴레이의 마을」)라는 고백은 시적 주체의 일상-비일상(전복)-슬픔의 메커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의 실패는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그의 다다적 모험은 일상을 내파하는 방식으로 시도된다. 그것은 언어 실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언어는 단일하고 충만한 언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드는 다성적 목소리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일상을 내파하는 레이디다다의 행위일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의 개코원숭이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방은 어떤 곳일까 아이아이 학교 가기 싫어 아이아이 싫어싫어 징징대는 새끼 원숭이를 엄마 원숭이는 코코 달랬을까 개코개코 야단쳤을까

                                                                                               - 「멍멍, 아이아이」부분


석민이도 아니고

명호도 아닌

영섭이가 지금 말하는 거예요

당신을 진정 사랑해요

아니, 결코 널 용서할 수 없어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문 닫을 시간입니다

널 죽여 버릴 거야, 오, 오...... 당신을 사랑해요

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

                                                                                           - 「변검쇼1」부분


      그의 언어적 모험은 일상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이와 엄마의 일상적 대화는 곧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드는 언어적 유희이거나, “석민” “명호” “영섭”이라는 일상인의 발화는 얼굴을 바꾸며 발언하는 변검(變臉)의 언어들이 된다. 단일한 언어체계에 균열을 가하는 언어연쇄에 의한 언어유희는 첫 시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요놀이와 서술형 어미에 “요”를 붙이는 방식의 말놀이는 마치 힙합가수들의 음악적 언어놀이를 닮아 있었다(「요요놀이」). 두 번재 시집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데, 가벼운 말놀이라기보다 무거운 슬픔이 묻어나는 다성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정체성을 강제하는 이름이 의미를 털어버린 무의미한 시니피앙으로 작용하거나, “아이”라는 인간을 지시하는 말 역시 “아이아이”라는 의성어로 대치된다. 그리고 일상을 벗어난 고대 그리스인의 언어와, 의미의 규준인 엄마의 언어와, 엄마의 언어로부터 일탈하려는 이이들의 탈일상적 언어가 부딪힐 때, 단일한 언어체계는 파편화되며 일상의 공간은 균열된다. 일상의 기저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다다이스트의 전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다다각시”의 화법이자, 슬픔의 근원일 것이다. 근원적 파괴가 아니라, 내파라는 부분적 파열은 그의 결핍이기도 하거니와 슬픔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다성적 언어는 한 입술에서 발화되는 여러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얼굴과 여러 입술에서 나오는 다성성의 특징을 갖는다. 오늘은 석민이지만, 어제는 명호였고, 원래는 영섭이라는 인물의 입술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얼굴을 바꿔가며 말하는 자, 이름을 바꿔가며 말하는 자, 하나의 입술에서 말하는 여러 개의 다른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입술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 그것은 “다다각시”의 언어적 기획이다. 뒤샹의 다다가 일상의 사물에서 초월하여 사물의 본질로 몰입해가고, 꿈과 환상의 초현실로 잠입해 들어갔다면, 정채원의 “다다각시”는 일상을 초월하지 않은 채 일상의 구조를 내파하는 방식으로 다다를 실현한다. 그것은 다다이스트로서는 실패일 수 있지만, 레이디 다다이스트만의 고유한 실현방식이기도 하다. 일상을 벗어나지도, 함몰되지도 않은 채 일상의 궤도 돌기, 돌면서 균열을 가하기. 그것은 압력밥솥의 추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갈릴레이 마을”에서 살아가야 하는 “다다각시”의 존재방식이다. 그것이 슬플지라도, 때로 실패일지라도 말이다.




             임지연 평론집 <미니마 모랄리아, 미니마 포에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