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렌즈의 좋은 시 「배달사고」정채원/홍기정 문학평론가
배달사고
정채원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벨을 한 번 더 누르는 대신
작은 상자를 두고 떠난다, 택배기사는
8동과 9동 사이로
꿀항아리를 주문한 8동 403호
주인은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내가 입이 쓴가, 입맛이 변했나
꿀맛이 왜 이리 쓸쓸할까, 씁쓸한
해골바가지를 퍼먹으며 한없이 빠져든다
무슨 꿀맛이 이리 바닥이 없나, 캄캄하게 달고 깊은가
사후세계를 주문한 9동 403호
주인도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말기암이라 입맛도 길을 잃었나
안경을 쓰고 퍼먹어도 역시 달콤하다
이정표를 꼭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보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퍼먹어도 퍼먹어도 꿀맛인 세계
죽어서도 수저를 놓을 수 없는 세계
너는 다른 세계로 잘못 배달된 것인가
나는 나를 잘못 찾아온 것인가
잘못 든 길이 끝내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오늘도 택배기사는 벨을 누른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말없이 상자를 두고 떠난다
상자가 바뀌거나 주인이 죽거나
상자가 죽거나 주인이 바뀌거나
오늘의 배달은 무사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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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택배로 주문한다. 꿀항아리는 그렇다 쳐도 사후세계라니,
택배물품을 배달하는 배달기사도 이상하다. 그는 벨을 단 한 번만 누른다. 사람들은 그 벨소리에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데, 그러면 그는 택배상자를 근처 아무 곳에나 대충 놔두고 떠난다. 그래서
심심찮게 배달사고가 일어나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상관하지 않고 "오늘의 배달은 무사히 끝났다"
하면서 마음 편히 떠나 버린다.
이 무책임한 택배기사는 '운명'을 배달하는 운명의 배달기사이다. 이것은 그가 취급하는 배달품
목에 사후세계가 포함된다는 것에서 유추 가능하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꿀항아리 같은 행운을, 누
군가에게는 해골바가지 같은 불운을 배달한다. 그러나 정확한 배송에 신경쓰지 않고 대충대충 일
하기 때문에, 꿀항아리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해골바가지가 가고, 해골바가지를 받아야 할 사람에
게 꿀항아리가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곤 하는 운명의 아이러니는 이래서
발생한다. 운명을 배달하는 배달기사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번 누르는 그의 벨 소
리를 놓치지 않고 잘 듣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무당 같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인 것 같다.
하기야 운명의 잘못된 배송이 우리에게 꼭 불이익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니, 정확한 배송을 받
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도 애초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배송이 엉망으로 이루어지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갈 꿀항아리가 뜻밖에 내게로 오는 경우도 있게 마련일 테니까.
앞에서 꿀항아리를 행운으로 해골바가지를 불운으로 보고, 배송사고로 인한 두 물품의 뒤바뀜을
운명의 뒤바뀜으로 이해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꿀항아리의 단맛을 기
대한 사람이 해골바가지의 쓴맛을 맛보는 것은,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한 뒤에 만족감 대신 뜻밖의
공허감 같은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또 사후세계를 기다린 사람이 꿀항아
리의 단맛을 맛보는 것은, 죽음을 앞둔 순간의 느낌이 허탈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의외로 편안하
고 달콤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운명의 엇갈림이나 삶의 아이러니는 문학이 오랫동안 다루어 온 무게감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반면 택배 배송사고는 현대의 일상에서 간혹 경험하곤 하는 시시하고 짜증나는 사건이다. 이 시의
매력은 여러모로 상반된 성격을 가진 이 둘을 연관지었다는 데 있다. 허공에 대고 짧은 욕이나 퍼붓
고 말 일상의 사건이 묵직한 주제를 담은 시의 재료가 되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문학청춘』201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