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의 몽타주, 들끓는 타자/조재룡(문학평론가)
특이점의 몽타주, 들끓는 타자
-문학동네 시인선 126,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해설
조 재 룡
다중의 시선, 다가성의 화면
정채원의 시는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가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괄호를 자주 지워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점묘(點描)와 모형(母型) 등이 주를 이루어 ‘게슈탈트’라고 우리가 부를 무엇을 구현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며 시집은 문자와 문자,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잇고 덧대면서 폭발하듯, 그러니까 예기치 않게 형성되는 조직-구성-짜임을 읽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지워진 괄호의 틈새로 강렬한 이끌림이 자리하는 것은, 행과 행, 연과 연, 시와 시 사이에 연결된 끈이 존재하나, 그 선이 실상, 실선이 아닌 점선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의 어휘와 통사는 어김없이 굽어 있다. 시인은 이 곡선들을 재고, 헤아리고, 숙고한 끝에,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더듬거리듯, 경쾌하고도 진지하게 전진을 꾀한다. 손끝에서 흘려보낸 문장 하나, 또 단어 하나가, 모이고 헤어지고 뭉치고 결별하는 일련의 작용을 통해, 점(點)의 그물망처럼 촘촘히 짜인 거대한 파노라마 하나를 펼쳐낸다. 정채원의 시에서 파노라마를 마주하는 순간은 우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윤곽이 펼쳐지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이기 때문이며, 그제야 우리는 전체에 시선을 빼앗길 뿐이다. 시에는 이렇게 이음매가 없다. 대신, 겹겹이 포개진다. 시는 다중(多重)의 시선으로 촉발되는 다가성(多價性)의 화면과도 같다.
변심한 연인을 찌른 당신의 칼날에
장미가 문득 피어났다
칼날을 적시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꽃잎이 닿는 순간
살도 뼈도 녹아내린다
무쇠 덩이도 토막이 난다
쓰러뜨린 얼룩말을 뜯어먹는
사자의 붉은 입처럼
장미는 점점 더 싱싱해진다
백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겠다는 듯
부드러운 혀로 도려낸 심장들이
담장에 매달려 너덜거리는 6월
갓 피어난 연인들은 빰을 비비며
서로의 가시를 핥고
밤새 바람을 가르던 칼날 위로
변심한 장미가 빼곡하게 피어났다
어느새 칼날을 다 삼켜버린
핏빛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장미 축제」 전문
“변심한 연인을 찌른” 칼날에 묻어 영롱히 흐르는 피는 그 색이 붉고, 또 잠시 고여 매끄러운 저 금속 결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투명한 칼날에 흘러 번져난 피의 이미지가 연상에 힘입어 붉은 장미 잎을 백지 위로 불러낸다.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는 것은 축제를 즐기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숱한 경험에 대한 유추일 수 있으며, 이미지가 삼키고 뱉어낸, 모종의 사연을 집약한 서술일 수도 있다. 비교적 순조로운 연상과 유추는 그러나 여기까지다. 더 이상 연상과 유추의 괄호는 채워지지 않는다. 문제는 이 붉은 꽃잎이, 언제건, 무엇이건, 제 색으로 물들일 줄 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이미지의 단순한 확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차라리 그것은 일종의 포갬, 정확히 말해, 포개어 깨트림, 그러니까 유추-유사-연상-시간-공간-추체험 등,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정되는 저 이음매의 틀 자체를 전복시키고야 마는 특이점이 창출되는 순간에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장미(대상)-피(본질)-얼룩(형태)은 텔레비전 화면으로 들어가 “얼룩말을 뜯어 먹”은 “붉은 사자의 입”과 포개어지는가 하면, 세월과 시간을 무지르며, 과거인지 현재인지 또 미래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너덜거리는 6월”의 어느 날로 달려가, 한 번 더 “담장” 위로 오롯이 펼쳐져 “부드러운 혀로 도려낸 심장들”을 돌연 피워내며 눈부시게 전이한다. 담장에 빼곡하게 피어난 장미가 “뺨을 비비며 / 서로의 가시를 핥고” 있는 “갓 피어난 연인들”과 재차 포개어진다. 이미지의 포개짐은 이렇게 “핏빛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에 이르러, 대상-본질-형태의 근본적인 전이를 실현하며 화들짝 절정을 맞이한다. 환유는 일부를 쥐고 행과 행, 연과 연 사이로 재빠르게 이동하면서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오히려 중심을 이루는 대상-본질-형태의 근본적인 전이는 전적으로 이 갑작스러운 포갬, 그러니까 몽타주의 구성 방식에 달려 있다. 몽타주는 유추의 결과를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칼날’―‘붉은 장미’―‘붉은 사자의 입’―‘부드러운 혀로 도려낸 심장’의 예기치 않은 충돌을 견인해내면서, 각각의 대상-본질-형태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부가적이고 창조적인 의미망을 그려 보이는 데 일조한다. 시를 한 편 더 읽는다.
수면제를 한 움큼 입에 털어넣었다
몇 해 전 자살한 여배우가
스크린 속에서 오늘도
응급실에서 다시 깨어났다
우연히 들러 119를 불러주던 친구도
이젠 은퇴했겠지
그녀의 무덤 위 풀을
봄비가 다시 깨우고
공원묘지 끝
바다가 보이는 언덕
바다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몇 번 회오리치다
다시 바다 쪽으로 몰려가고
남녀 주인공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달려와
만나고 첫 고백을 하던
그리고 헤어져 떠나던
영화 속 그 가파른 언덕처럼
영화가 끝난 뒤
부스스 깨어나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던 관객들처럼
아무 것도 부둥켜안지 않은 바람이
떠나며 쓰다듬는 가설무대
전생의 원판을 넣은 환등기처럼
햇빛이 한동안 무덤을 비추면
남녀 주인공이 또다시 달려나오고
그녀 손에 들린 꽃다발과 그의 모자 사이에서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오르고
― 「영화처럼」 전문
“수면제를 한 움큼 입에 털어넣었다”는 자살한 여배우가 그런 것인지, 그것이 화자의 행동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시에 첫 문장으로 주어진다. “공원묘지 끝 /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그녀의 무덤”은 현재 시점의 서술이며, “영화 속 그 가파른 언덕”과 포개지면서 모종의 충돌을 빚어낸다. “영화가 끝난 뒤 / 부스스 깨어나 /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관객들”의 시선이 아직 머물고 있는 “가설무대”가 여기에 추가되면, 시는 이상한 물결에 몸을 맡겨 출렁이고,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살아 연기를 하는 여배우, 그러나 현재에서는 자살한 여배우를 과거 어느 시점에서 화자가 이 여배우가 출현한 영화의 장면을 지금-현실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설정으로도 첫 연의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는다. 몽타주를 충돌시키듯 구현된 서로 상이한 시간의 포개어짐, 인과성을 결여한 행위들이나 이질적인 장면의 이접(離接)은 정채원의 시에서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시각으로는 볼 수 없지만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된 것들이, 단단히 묶여 있던 제 확실성의 사슬에서 풀려나오는 커다란 단초를 이룬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전생의 원판을 넣은 환등기”가 지금-여기에 켜지고, 그러고 나면, 거기서 “남녀 주인공이 또다시 달려나”오고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련의 행위는 따라서 현재의 행위인지, 사실에 부합하는 묘사인지, 혹은 상상을 기록한 결과인지, 그 구분 자체가 모호한데, 오히려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상한 체험, 기이하고도 낯선 경험을 시적 실천의 반열에 올리면서 폭발하듯 몽타주의 특이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포갬-깨어짐, 특이점의 몽타주
정채원의 시에서 대립적 몽타주의 충돌로 파생된 대상-본질-현상의 전이나 전(前)-미래적인 사건의 실현은 초현실적인 세계에로의 시적 구현이라기보다 오히려 ‘버추얼적인 것’의 제시, 혹은 그것의 실천-실현이거나 모호성-애매성을 통해 가닿는 미지의 언저리, 그것의 기록에 오히려 가깝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룰 수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던 무언가가 백지에 기록되는 일이며 “끊임없이 진화중인 블랙홀 속”(「도망자」)에서 머물고 있던 것들을 호출하는 방식이자, 지각과 망각 사이 어느 지점에 고여있던 애매한 신경의 촉수들을 현실의 화면에 구겨 넣어 들여다보는 도구이며 “기쁨과 분노와 슬픔이 섞여 울퉁불퉁한 미소를 피워내기도 하는 심해”(「딥 페이스(Deep Face)」)로 잠수를 하거나, 현재 서술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화면 하나를 비끄러매 “구불구불한 유년을 기어오르는 계단” 저 위 과거로 달려가, 저기와 여기, 과거와 현재를 이접하듯 붙잡아 죽기 직전에 솟아나는 아우라와 같은 파편의 “신음 소리”를 “망치질”(「방진막」)의 공명처럼 기록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수단이자, “단두대에서 잘려나간” “머리통의 두 눈”이 잠시 “껌벅”이는 저 “육 초”간 순간의 사정을, 이 머리에 달린 귀가 가족의 울음 듣고 간다는 현실-나의 이야기와 충돌시켜 “시간의 목에 칼금을 긋는 동안”(「머리에서 가슴 사이」)을 마치 플래시백처럼 포착하고, 드러내며, 기록의 반열에 오르게 할 가능성을 타진해 나가는 누빔 점과도 같은 것이다. “두 개의 번개가 동시에 머리 위로 떨어”지듯, 이질적인 것을 서로 포갠 말들로 명멸하듯 번져나가는 기이한 사태를 받아내고 “보이지 않던 것이 얼핏 보일 때”까지 부지런히 “시간과 공간의 벽을 뚫”(「벌레 구멍」)으려 하는 행위와도 같다고 할까? 정채원에게 몽타주는 유사한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상상력과 주관성이 개입한 틈새를 열어보여,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을 구현하고, 이룰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실천의 반열에 오르게 끔 경이로운 입을 달아주는 데 바쳐진다.
잠도 공중에서 잔다는
짝짓기도 허공중에서 한다는 칼새처럼
칼집은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재빨리 십자로 스윽
비명 새어 나오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혼자 발효되도록
차가운 방에 한동안 들어가 있어
포장을 벗어버린 생각들이
저희들끼리 밤새 치고받으며
절망이야 아니야
꼬집고 쓰다듬다 마침내
칼집을 부둥켜안고
반죽은 한껏 부풀어 올랐네
다 놓아버리는 순간
칼새는 바람에 날려다니는 지푸라기를 모아 침과 섞어
집을 짓는다지
새살이 차올라 저절로 딱지를 떨굴 때처럼
빵껍질은 노릇노릇 구워졌네
몰라보게 깊고 넓어진 칼집들
어떤 건 키르케고르 입술 같고
어떤 건 화살표 같네, 뜨거운 오븐 너머
사랑은 변하고 환상은 깨어지며 비밀은 폭로된다
칼새가 내 심장을 스치고 날아가네
빵냄새에 코를 박고
빵을 한입 가득 베어 무는 시간
― 「칼집 넣은 빵」 전문
‘칼새’와 ‘칼집’은 ‘칼’이라는 음성적 유사성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다. ‘칼새’는 허공을 날고 ‘칼집’은 ‘반죽’ 어디쯤, 윗부분에 새겨진다. 각각 지상에서, 대상에서, ‘떠’ 있다. ‘떠 있다’에서 칼새와 칼집이 서로를 마주할 연결점, 바로 그 희미한 점선이 생겨난다. 반죽에 칼집을 내는 작업은 칼새가 공중에서 짝짓기하는 모양새와 절묘하게 포개어진다. 칼새와 칼집이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 재빨리 십자로 스윽”과 같은 행위를 이접해내는 동시에 낯선 방식으로 공유하면서, 말의 경제성이 시에서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칼집을 낸 빵 반죽은 발효될 때까지 냉장고에 넣어 둘 모양이다. 발효될 때까지 반죽은 숙성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반죽에는 포장이 없다. 반죽은 “포장을 벗어버린 생각들”을 가지고 서로 치고받고 토론을 하며, 제 고민을 한 움큼씩 털어놓는다. 고유한 성분의 변화를 거쳐 발효에 이르려면 반죽은 화학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반죽의 입자들에게는 “절망”일 수도 있다. 갑론을박이 있은 후(“꼬집고 쓰다듬다 마침내”) 시간이 흐르니, 입자들 서로 하나가 될 운명을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자기들 몸에 새겨진 저 표식, 그 칼집을 새긴 채(“칼집을 부둥켜안고”) 한 덩어리가 되어 냉장고 안에서 차츰 부풀어 오른다. 화자의 이인칭 명령투로 냉장고에 들어가게 된 반죽은 고민을 주고받다가 이어 고백체로 변주되면서, 화자와 삼투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렇게 “다 놓아버리는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앞서 기술되었던 칼집난 반죽이 발효를 기다리며 갖게 된 고민과 고통과 절망과 울음 저 안으로 시인이 어느새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 놓아버리는 순간” 이후, 다시 화자는 칼새가 “지푸라기를 모아 침과 섞어 집을 짓는다지”라고 이어받아 방백 투로 말한다. 칼집을 새긴 반죽이 익어 빵이 되려면 이제 오븐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잘 구워진 빵이 완성되었다. 빵에는 “키르케고르 입술” 같은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흔적들이 새겨있으며, 구워지며 벌어진 칼집의 깊이와 너비는 배가된 동시에 거기에는 “칼새가 내 심장을 스치고 날아가”는 순간이 시간-공간-기억을 이상하고도 기이한 공존 상태로 머금으면서 각인되어 있다.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는 꽃과
꽃병 속에 발을 담근 채
서서히 골아가는 꽃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목이 타들어가는 입술 속에서
촉촉이 젖은 주름투성이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는 것은
제 침묵의 형식을 지키려는 것
까마득한 봄을 그녀는
꽃잎 하나도 떨구지 않은 채
그대로 박제하는 중이다
목젖이 보일 때까지 흐드러지게 웃어본 장미가
꽃병 속에서 하루하루 발가락이 검어지는 동안
입술이 떨어져나가는 동안
아직 향기를 기억하는 바람 속에
꽃잎의 웅얼거림이 환청처럼 밀려오고 밀려가고
방부 처리된 시간을 한 아름 안고
병상에 누운 그녀에게
막 피어나는 장미를 한 다발 들고 온 딸
죽은 꽃병을 비우고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운다
입술의 지문은 나선형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말없이 올라간다
― 「입술의 형식」 전문
시계는 오늘도 소란하게 죽어간다
두 개의 바늘을 제 살에 꽂고
신음소리, 째깍째깍
구름에 매달린 링거는 보이지 않아도
나날이 수액이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고
시간이 마르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
혼자일수록 더 잘 들리는 시간의 들숨과 날숨
시간 너머로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검은 문은 어김없이 열리겠지
소리 없이 신음하는 자가
더 아프겠지, 피가 마르겠지
잉크가 마르고 있다
써지지 않는 볼펜을 꾹 꾹 눌러 쓴다
잉크 없이 쓰는 글자가
더 선명하다,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 너머로 기억을 보내도
기억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툭 툭
피어나는 봄꽃을 막을 수 있나
― 「무음 시계」 부분
정채원의 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셀 수 없는 정지화면”이 겹겹이 “모여 한 생애가 되는”(「스틸」) 순간들을 팽팽한 긴장의 사건으로 그려내며 “평범한 그 안에서 / 비범한 그를 포착하는 순간”(「달아나는 자화상」)을 한껏 그러 쥐고, “절룩거리면서도 빠른 템포”의 말들을 부려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파라다이스 리조트」)가며, 삶의 고비마다 망설임 없이 엎질러지면서, 죽음과 삶에서 마모된 형태의 기억들을 불러 모은다. 자명한 구분은 여기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침묵과 발화, 죽음과 삶, 타자와 자아, 과거와 현재 등을 가지런히 나누어 가로막는 방벽에 구멍이 나고, 규정될 수 없는 것들, 정의될 수 없는 것들, 과거-현재-미래에 공존하는 나를 타자들의 들끓는 외침으로 받아낸 언어의 행렬들이 이 틈새를 메우면서, 대상과 주체,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지워내거나 양자를 봉합해낸 자리에 새로이 탄생하는 변이들을 맞이한다. 시인은 “잡고 놓지 않는 문......” 그러니까 서서히 줄여나가는 말(文)의 고안을 통해 “잡고 놓아주지 않는 질문”을 담아내며 “쉽게 답할 수 없는 / 질문을 자꾸 던”(「불구」)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서로 맞물려 있는 것들, 나란히 마주하며 팽팽한 긴장 속에 놓인 것들, 가령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는 꽃”과 “꽃병 속에 발을 담근”(「입술의 형식」) 꽃들은 터질 듯 팽팽하게 대립한다. 굳게 다문 아래 윗입술의 좀처럼 열리지 않을 저 요철의 일선(一線)도 굳건한 침묵과 그 긴장 외에는 실상 무엇도 기대할 수 없다. 시인은 극명한 긴장의 상태에서 팽배해진 대립적 이미지를 서로 충돌시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절체절명의 아슬아슬한 순간, 발화의 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했지만, 굳게 다문 두 입술을 열고서 했을 수도 있었을 말들(“목이 타들어가는 입술 속에서 / 촉촉이 젖은 주름투성이 입술이 /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오로지 전미래의 형태로만 실현될 침묵과 그 안에 흐르고 있을 버추얼적인 언사를 현실로 흘러나오게 하는 순간까지 밀어붙이며, 마술적 환등을 투사한 듯 빼어나게 언어를 부린다. “침묵의 형식”이 병상의 환자가 말을 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대한 묘사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순간은 “목젖이 보일 때까지 흐드러지게 웃어본 장미가 / 꽃병 속에서 하루하루 발가락이 검어지는 동안”이 병상의 환자에게 임박한 죽음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 못한 말은 굳게 닫힌 입술을 뚥고 “나선형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말없이 올라”가고, 이렇게 “입술의 지문”이 백지 위에 제 인장을 찍는다. “침묵의 형식”은 “환청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꽃잎의 웅얼거림”, 그러니까 죽음에 임박해서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신음과도 같다. 정채원은 “써지지 않는 볼펜”으로 “침묵의 형식”을 필사하며, 죽음 앞에서 “매일매일이 최후의 몸”인 그 순간을 붙잡아 죽음을 정지시킨다. 최후의 순간, 그 모습이 고스란히 박제된 채 “차가운 잿빛 석고로 / 다시 살아난 사람들”(「최후의 날」), “매일매일이 최후의 표정”을 짓고 있는 폼페이의 저 사자(死者)들은 죽음을 정지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정지되는 순간, 폭발할 것과 같은 긴장이 크로키처럼 포착된 순간, “시곗바늘”을 녹여버리는 순간을 시인은 지금-여기서 직시하고 적시한다. 죽음을 박제하듯 보존하는 최후의 순간들은 “진공상태로 납작하게 구겨진 채 남아 있”는 “압축보관”(「압축보관」)되는 순간이며, 서술의 전진을 가로막는 대립적 몽타주를 통해 트여오는 예기치 못한 변이가 실패와 비극, 죽음을 사건처럼 체현해낸다.
일상이 사건이 되는 순간들
정채원의 시는 난해성에 복무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말들을 일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부릴 뿐이다. 일상의 장면들을 날 것 그대로 붙여놓은 콜라주도 충돌적인 몽타주가 쏘아 올린 특이점의 창출에 일조한다.
십 년간 부은 적금을 타고, 세 배로 뛴 주식을 어깨에서 팔고, 은행 융자를 낀 22평형 아파트 잔금을 치루고, 내일부터 칠과 도배를 주문해놓고 귀가 중, K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생후 15일 된 S는 선천성 심장판막증.
90이 넘은 노모는 천식이 있어도 잘 견뎌왔는데 메르스를 이기진 못했다.
T는 3수 끝에 S대에 합격했다. 재수 시절 술도 배우지 못한 그는 신입생환영회에서 기도가 막혀버렸다.
기도는 종종 막힌다. 기도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화살기도로는 뚫지 못한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 한 번 꽝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 다신 열리지 않는다. 그만?
― 「닫히면 그만인 문」 전문
이따금 뒤집혀 허공을 긁는다. 검은 바탕에 흰 점이 있는 놈도, 붉은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놈도 찔레 덤불 속을 헤맨다. 간신히 가시를 피한 날은 스스로 가시가 된다. 날카로운 이를 먹이 속에 찔러 넣고 속을 꺼내 먹는다. 속이 텅 빈 껍질을 통째로 삼키기도 한다. 어둠 속 풍등처럼 날고 싶은 밤, 몸 안에 불덩어리를 품고 바람 따라 날고 싶은 밤이면, 낮 동안 먹힌 것들이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깨어나곤 한다. 점박이광대벌레는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되새김질을 한다. 먹이들 중에는 방금 짝짓기를 한 놈, 막 알을 깐 놈, 제 어미를 몰라보고 다른 어미 꽁무니를 무작정 따라가던 놈, 건드리면 바로 울음이 터질 듯한 놈도 있었다.
― 「점박이광대」 부분
신문기사나 곤충에 대한 보고서에 등장할 법한 기술은 현실의 어느 장면을 그대로 잘라 붙여놓은 콜라주와 닮았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자,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의 급습에 희생될 처지에 놓여 있는 자, 운 좋게 합격한 대학의 환영회에서 들이킨 술로 “기도가 막혀버”리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보고(報告)가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며, 마치 오려 붙여놓은 듯 시의 서두에 배치되었다. 비극은 물기를 제거한 채, 열거되며, 사실적으로 기술된다. “기도”(氣道)가 막히고, “기도”(企圖)가 별반 소용이 없다. 온갖 종류의 “기도”(祈禱)는 이렇게 차단된다. 목구멍도 막히고, 방책의 시도는 별반 소용이 없으며, 간절히 신에게 올리는 기도는 봉쇄된다. 현실은, 현실의 비극은, 이 셋을 모두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기도는 구원을 청한다는 점에서 비극에 눈을 감거나 회피하는 기만이기도 하다. ‘기도’는 이중-삼중으로 제 의미를 변환하면서, 달리 말할 수 없음, 급시의 상태에 대한 통고, 그러니까 ‘기가막히다’라거나 ‘기가차다’라고 우리가 말할 때의 그것처럼,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소모되기에 재현해서도 안 되는, 비극성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효율적이고도 경제적인 낱말이다. 비극적 사건은 울음마저 거두어들이는 재주가 있다. “한 번 꽝 닫히면 그만인 문”, “다시 열리지 않는” “문”이 이미-벌써 닫혔기 때문이다. “그만?”은 여지나 의심이지만, 이 의심은,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에서 결구로만 주어지며 여운을 남길 뿐이다. 사실적으로 어떤 벌레의 묘사에서 착수하는 「점박이광대」도 대상의 성격과 추이의 보고서를 콜라주한 형식을 취한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벌레’는 “아직 손금이 여물지 않은 아이”와 포개어지며, 그 순간 원관념은 서서히 주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충돌의 이미지를 순간에 빚어낸다. 겹침은 물감처럼 무언가를 흩뜨리며 환유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어느 순간을 붙들어매며 정지시킨다. “뒤집어 놓다가, 하품을 하다가, 벌레다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일에 열중한 “절룩거”리는 아이와 “이따금 뒤집혀 허공을 긁는” “벌레”가 이렇게 충돌할 때, 원-이미지는 단박에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의 불완전성과 고통이 폭발하듯 솟구쳐 오른다.
지하의 네모 속으로 밀려들어간 사람들
꼬깃꼬깃한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각자 일인용 네모 속으로 들어간다
눈그늘이 짙은 얼굴들, 희미한 미소 속에
발을 밟혀도 옆구리를 찔려도
네모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는다
네모 속에서 하트를 날리거나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혼자만의 밀실을 개방한 적은 없지만
어느 틈에 이웃인 양 스며들어온 유령들
백만짜리터져서, 내여자가매일나만보는, 물건먼저받아보시고
결정하세요, 제목 없는 초대장을 좌르륵 펼쳐보인다
삭제 버튼을 눌러도 쉴 새 없이 파고드는
얼굴 없는 입술들, 발 없는 발자국들
손바닥만 한 네모 안에서 천둥이 치거나 별이 떨어진다
눈동자들이 출렁거리는 밤바다를 배경으로
왈칵, 울음 터뜨릴 듯한 얼굴이
꼭 닮은 얼굴을 마주보며 덜컹거리는 검은 창문
검은 밀실에서 인양되지 못한 눈동자는
명멸하는 네모 속에 셀 수 없는 물음표를 심는다
답을 찾지 못한 너와 나의 통점은
빛의 속도로 만나고 싶어
만화경 독방 속에서 각자 썩어간다
신도림新桃林! 다음은 신도림!
네모의 출구를 향한 네 심장이
붉은 화살표처럼 깜빡거려도
문은 언제든 너를 배신할 수 있다, 지하에서
환하게 불 켠 지하로 이어지는
다음은 환생역이다
― 「네모의 효능」 전문
네모난 전철에 몸을 싣고, 네모난 핸드폰을 열고, 그 안의 네모난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밀실 속의 밀실 속의 밀실과 같은 곳에 눈동자가 가닿는다. 흡사 “만화경 독방” 같은 풍경이다. “백만짜리터져서, 내여자가매일나만보는, 물건먼저받아보시고”는 핸드폰 화면을 그대로 콜라주 하듯 붙여놓은 것이다. 이모티콘이나 광고 메시지 등 “삭제 버튼을 눌러도 쉴 새 없이 파고드는 / 얼굴 없는 입술들, 발없는 발자국들”이 저 네모난 액정화면 안에 바글거린다. 생-삶이 통째로, 켜켜이 네모에 담긴다. 네모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시 네모, 그러니까 “꼭 닯은 얼굴을 마주보며 덜컹거리는 검은 창문”을 만날 뿐이다. 네모는 겹겹이, 켜켜이 중층을 이룬다. 커다란 네모 속의 조금 더 작은 네모 속의 손아귀에 쥐고 있는 조금 더 작은 네모 속의 저 네모난 화면, 바로 이 “검은 밀실에서 인양되지 못한 눈동자”를 떨구며 우리는 “명멸하는 네모 속에 셀 수 없는 물음표”를 심고 있다. 현실의 생생한 장면들, 사실적인 모습들, 일상의 일면들이 고스란히 시에 담긴다. 어느 역에서 내려 밖으로 안내하는 화살표를 충실히 쫓아 네모의 출구를 향하는 마음 뒤로, 문을 잘못 열어 추락하는 이미지가 충돌하듯 번져나가면서, 지하에서 지하로 이어지며 깜빡거리는 죽음의 불빛을 밝힌다.
한쪽 눈이 말을 안 들어 깜빡, 오른쪽 귀가 못을 씹었어 깜빡, 내 이름이 생각이 안 나 깜빡, 너를 찾아가는 길을 잊었어 깜빡, 두개골을 씻을 수 없어 깜빡, 자꾸만 흘려 깜빡, 자꾸만 떨어뜨려 너를 깜빡, 끓어오르며 타오르며 깜빡, 사과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며 깜빡, 익어가며 썩어가며 깜빡, 칼을 씹었어 깜빡, 삼키지도 못 해 깜빡, 입술 사이로 가슴 위로 흘러내려 깜빡, 가슴을 씻을 수 없어 깜빡, 적셔 나를 적셔 깜빡, 푹 잠겨버렸어 깜빡, 숨이 뻣뻣해져 깜빡, 너를 부러뜨리지도 못 해 깜빡, 왼쪽으로 꺾지도 못 해 깜빡,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
신호위반하는 사람들
정지하지 못해 유턴도 못해
제 가슴에 제 머리를 박고
효수된 얼굴들 빨간불처럼 매달고
깜빡, 깜빡, 깜빡,
― 「신호」 전문
시는 “깜빡” 자체의 세계를 “깜빡”이 실현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점묘(點描)와 모형(母型)의 게토는 물론 “깜빡”이다. 반복되었지만 “깜빡”은 매번 다른 ‘가치’를 갖는다. 주체와 대상, 행위와 사실은 “깜빡”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재편된다. “깜빡”은 작동하지 않는 신체의 행위(“한쪽 눈이 말을 안 들어 깜빡”)나 과거 행위를 잊은 사실에 대한 적시(“내 이름이 생각이 안 나 깜빡”) 등등 매번 변화무쌍하게 제 가치를 달리한다. “깜빡”은 특정한 현실이나 행동, 신체 기관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낱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주체-대상-행위-사실을 형성하고 정의하면서 게슈탈트처럼 한 편의 시를 주조한다. 마지막의 “깜빡, 깜빡, 깜빡,”은 사물(가령, 신호등)의 현상이나 무언가를 망각하는 사람들과 그 습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머금고 또한 예기치 못한 사태를 사건처럼 폭발시키는 시작점과도 같다. 시는 이 결구에서 다시 착수되는 것일 수 있다.
폭포 위로 외계인이 착륙하는 날
꼬리뼈에 꼬리가 다시 자라나는 날
태양이 지구를 도는 날
이런 날들을 기다린다
(...)
무럭무럭 자라난 꽃대
내 심장을 뚫고
불쑥 솟아난
팔 다리, 내 것이 아닌
내 것이 아닌 것도 아닌
허우적거리는 붉은 혀
펄럭이는 침묵들 사이
― 「슬픈 숙주」 부분
언제쯤 나는 바닥에 닿을 수 있나
언제쯤 어혈을 다 풀 수 있나 나는
언제쯤 나를 다 쓸 수 있나
밥을 먹을 때도
동사무소에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나는 끝없이 계단을 구르고 있지
그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문을 닫지 못하고 있지
― 「끝없는 계단」 부분
죽는 건
죽어서도 다시 날아오르는 것
갈 수 있는 끝에서 끝까지
존재하지 않는
터널을 뚫는 것,
아무도 노래하며 지나가지 않는다 해도
― 「벌레 구멍」 부분
내 안에 아우성, 불현듯 튀어나오는 타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는 것과도 같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과 같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려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 파악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있을 것이라 믿어지는 것들에, 막힌 말들, 뭉친 말들의 저 “어혈”(語血)을 풀며 “의심과 확신이 뒤섞인 / 얼룩무늬 질문이 닫히는 날”(「해피엔딩」)까지 그 윤곽을 잡아가는 행위이다. 시간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삶도, 아니 삶 이전이나 저 이후도, 기억도, 현재의 걸음걸이도, 내 앞에 놓여진 대상도, 내가 비춰보는 거울도, 그 거울 속의 타자도, 내 걸음도, 내 걸음의 보폭도, 보폭이 뒤로 지워내는 건물들이나 그 크기도, 앞서 달려오는 시야도, 뒤로 지워지며 나타나는 잔상도 마찬가지다.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흑등고래」) 것처럼, 확실하다고 여겨졌던 것들도, 모두 그 반대편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것들, 그러니까 항용 불확실하다고 여겨지거나 그 통념에 가려 볼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 그렇게 존재 자체가, 현상 자체가, 사유 자체가 불확실하다 여겨졌던 것들도, 달리보면 확실한 것과의 경계가 명확한 것은 아니며, 차라리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부호”(「사해」)의 얼굴을 하고, 삶에서, 혹은 죽음에서, 이 둘이 교차하며, “때로는 당신 같고 때로는 나 같은 그들, 늘 지루한 그들, 바보 같은 그들, 서로 너무 닮아 가짜가 진짜이고 진짜가 가짜인 그들”(「지루한 미트볼」)이 펼쳐내는 희비극의 극장에서 홀로그램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정채원의 시는 몽타주를 통해서, 이접을 통해서, 콜라주를 통해서, 혹은 절묘한 알레고리를 통해서, 시점의 다각화를 통해서, 타자들의 장면들을 연출하고, 확실성의 저편에 선 것들, 그것들의 힘으로, 타자의 움터오는 목소리를 “허우적거리는 붉은 혀”로, 주관성 가득한 언어로 기록한다. 그의 시에는 형이상이나 추상이 얼씬거리지 않으며, 사변으로 궁굴리는 초현실에 복무하는 난해함 자체가 발을 디딜 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정채원의 시는 시점을 달리하여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면서 결락과 틈새의 언어를 축적하며, 자신-타자-세계의 위치를 바꾸면서 몸과 마음의 난해한 방정식을 풀어나가고, 시간을 끌어당기거나 휘게 하거나 주관의 편으로 서게 하여 스스로 물음을 찾아 나서는 말을 고구한다.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 신기루 속의 신기루”처럼 기억을 포개거나 꿈을 필사하는 그의 시에는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 너”(「파타모르가나」)와 죽음의 풍경과 풍경이, 삶의 장면과 장면을 겹치거나 포개어 놓으며 괘락과 공포가 선사하는 눈부신 대칭이, 공존하거나 공멸하거나 생성되거나 사라지는 것들이 하나로 어울리면서 실현되는, “펄럭이는 침묵들 사이” 저 들끓는 타자들이 바글거린다.
마지막 문장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 「미발표작」 부분
화면 밖에서 과거-현재를 장면을 동시적으로 바라보는 시야와 그 시야에서 가뭇거리다 이내 사라지듯, 이접되어 출현하는 미지의 두 거처를 열고 이 두 공간-장소에서 시인은 “한결 짙어진 그림자만 내려다보고 걷는 길”(「그, 그림자」), 저 고문을 당하는 긴박한 상태를 불현듯 불러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기록될 수 없는 성질을 지닌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은 차라리, 여기서, 산산이 부서진다. 이 악몽에는 주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