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검쇼 1
정채원
오늘은 석민이지만
어제는 명호였지요
원래는 영섭이예요
지금 당신에게 영섭이가 말하는 거예요
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
석민이는 늘 쥐색 정장 차림
바지주름 칼날 같이 세우고 다니는 사람
명호는 무릎 튀어나온 코르덴바지에
담뱃재 희끗희끗한 티셔츠바람
회칼로 반대파의 목을 따고도 귀갓길
말기 암 어머니 전화목소리에 귀가 젖는 사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에게
맘 놓고 속내 다 털어놓듯
비밀처럼 꽁꽁 숨긴 당신의 아픔
다 털어놓아도 돼요, 영섭에게
이제는 당신의 눈빛만 보아도 다 알아들을 듯한 영섭에게
석민이도 아니고
명호도 아닌
영섭이가 지금 말하는 거예요
당신을 진정 사랑해요
아니, 결코 널 용서할 수 없어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문 닫을 시간입니다
널 죽여 버릴 거야, 오, 오…… 당신을 사랑해요
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
*변검(變臉)쇼 : 중국 사천성 성도의 전통 쇼
배우가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묘기를 보여 준다
변검쇼 2
정채원
지체장애 1급 정운재 할아버지
양 손이 없는 그가
강원도 산골에서 밑둥만 겨우 남은 팔꿈치로
죽은 나무뿌리를 주워오기도 하고 캐오기도 한다
겨드랑이에 톱을 끼고
아내와 함께 톱질을 하고 조각을 한다, 죽은 뿌리가
여의주 입에 문 용도 되고
개도 되고
동자승도 되고
부처도 되고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는다, 그대 손길에
겨울잠 깬 개구리도 발치에서 튀어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
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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