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119

장미의 계절

장미가 다 지기 전에'장미'에 관한 졸시 2편을 올립니다. 장미의 배경 정채원 장미를 그릴 때 너는뒤에 숲을 그리곤 한다숲이 없다면 장미는 너무 초라해지루한 숲에라도 기대야겠지차라리물속의 장미구름 속의 장미사막의 장미숨이 차고 목이 타겠지만오늘은 잿더미 속의 장미를 그리기로 한다잿빛은 장밋빛과 너무 다르지내 장미는 잿더미와 잘 어울려잿더미 위에 피어난 심장불타고 난 뒤 아직도 피 흘리는새벽 두 시 칠흑의 장미그 부서진 심장으로 나는가장 향이 강한 향수를 만들지장미의 배경에는숨어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그와 몇 번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이승 아닌 듯한 곳에서 시집 『일교차로 만든 집』 장미 축제 변심한 연인을 찌른 당신의 칼날에 장미가 문득 피어났다 칼날을 적시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휴약기 외 1편/정채원

휴약기   온몸에 이면도로가 생겨난다긁을 때마다 개가 짖는다 구약도 신약도 아닌두통약을 한동안 끊으라고 참을 수 없이 날개뼈가 가렵다피나도록 긁고 싶은데늘 손이 닿지 않는다 닿지 않아 더 간절히 눈 감는 곳 참는 자에게 몫이 있다고진흙탕천국이 너의 것일 수도 있다고 상비약병을 열다 다시 닫는다두드러기 약으로 바꿔볼까?약은 약이나 전혀 다른 도약이나를 구원하리라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 아니라새로운 사랑이 아니라두드러기 나기 전에 끊는 것 개소리를 무시하고우리는 같은 약을 너무 오래 복용했다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오래전 부서진 누군가가손짓하며 부르는 듯 4천 미터 해저로 들어간 거다25만 달러를 내고 잠수정을 타고 심해 관광을 떠날 때사인을 했다, 쓰레기는 두고 간다고죽어도, 불구가 되도, 책..

우연과 규칙 사이 외 1편/정채원

우연과 규칙 사이 정채원  표범은 표범이 되었고비단뱀은 비단뱀이 되었다어쩔 수 없이 수박이 너무 익어가던 날 열대야에 정전이 되었고옴짝달싹할 수 없어요48층 펜트하우스에선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하염없이 녹아내리고 그러나주차장에 묶인 자전거는헬리콥터가 될 순 없어 우연으로도 규칙으로도될 수 없는 건 될 수 없다네 너무 익어가는 수박을 막을 순 없다네아무도 먹을 수 없게 된다 해도붉어지다 검붉게 터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네우연히 사람이 되었고규칙에 따라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네가 될 수 없고네 곁에 갈 수 없다네    Beyond The Scream* 정채원  벽장에 넣어둔 가방이 새벽까지 뒤척거린다 가방 안에는 백 년 묵은 얼굴뭉크 전시회의 입장권카푸치노 두 잔의 영수증 버려도 버려지지 않고 이따금 기지개..

레몬과 세숫비누/정채원

레몬과 세숫비누 정채원    레몬 한 방울 금속성 생활에 떨어지면 산소가 발생하지 푸른색 리트머스를 붉게 물들이듯 붉어지는 눈자위  쓴맛이 나는 비누로 닦아줘요 슬픔의 단백질을 녹여 미끌미끌한 표정을 갖고 싶을 때, 붉은 적의를 푸르게 바꾸려는 듯 깨진 창문으로 날아가려고    물질이 다른 물질에게 고백을 내놓고 물질이 또 다른 물질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상은 거품투성이    오늘은 산성 중성 염기성 가운데 어떤 표정이 어울릴까요?    눈물이 탄산과 반응할 때는 염기로 하품이 암모니아와 반응할 때는 산으로 매혹과 환멸 사이로 외줄을 타는 마음은 양쪽성 물질이 되고 싶은가 보다   《시와함께》 2022년 봄호

방진막/정채원

방진막 정채원  코발트블루 하늘에 뭉게구름 두둥실 그려 넣은막후엔 먼지가 풀풀 날리고망치질 소리, 깨지는 소리집 앞에 낙석주의 플래카드라도 걸어야겠다 구불구불한 유년을 기어오르던 계단밤과 낮을 함께 파먹던 벌레들과 곰팡이 얼룩들장막 뒤에서 젖은 손을 길게 뻗어외등을 켜고 끄던한 시절을 허물고 새집을 짓는 일마름모꼴 창을 새로 내고 깃털무늬 벽지를 덧바르는 일 옛집은 철거해도 사라지지 않는다새집을 깔고 앉은 마녀가 한밤중에도바람 분다고, 그때처럼 눈 온다고그 저녁을 불러오라고, 죽은 엄마를 데려오라고쇳소리를 낸다 어깨를 잡고 흔들어댄다 막후엔 뭉쳐진 먼지덩어리가 돌멩이처럼 굴러다니고기침 소리, 무, 물 좀 줘아무래도 이 밤을 못 넘기겠어신음 소리가 망치질을 시작한다나를 철거하고 새로 지어야겠다고쥐오줌 얼룩..

견딜 수 없어/정채원

견딜 수 없어 ― 정숙자 시인을 떠나보내며   며칠간이라도 앓다가 떠나지 않고 쌀을 씻다 느닷없이 떠나버린 그녀를 견딜 수 없어  이젠 밥을 지을 일도 밥을 먹을 일도 없어진 그녀를 견딜 수 없어  화요일에 금호역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월요일에 떠나버린 그녀를 견딜 수 없어  밤 1시에도 전화를 걸면 “네, 선생님!”하고 반갑게 받던 그녀 보내온 시집들에 일일이 손편지를 쓰고 있었다는 그 다정한 목소리 들을 수 없어 견딜 수 없어  ‘밀로의 비너스’ 없어진 두 팔이 들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내 엉뚱한 질문에도 맞장구를 치던 그녀의 끝없는 침묵을 견딜 수 없어  오징어의 내장을 미끼로 오징어를 잡아 올린다는 페루의 어부들 얘기를 밤새 주고받다 잠을 놓친 우리 둘인데  다시는 들어주지 않고 다시는 ..

사탕 마술 외 /정채원

논픽션 2 - 재방송 정채원   이 방엔 거울이 없다 그저 울 거는 많다 옆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물구나무 선 것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들이 널려 있다 훌쩍거리는 소리에 돌아다보니 상자가 하나 우그러지는 중이다 구겨진 종이들로 가득하다 구겨진 것들을 보면 펴보고 싶어진다 꿈이냐 현실이냐 선택하라는 글귀, 언제나 선택은 어렵다 아, 저기 유리창에라도 비춰보자 오른쪽으로 가란다 오른쪽 탁자 위엔 양면 거울이 하나 놓여 있다 한쪽은 실물 크기로 다른 한쪽은 확대경으로 된 거울이다 확대도 축소도 원치 않아 토끼귀는 토끼귀로 쥐똥은 쥐똥으로 보여줘 내가 내 눈동자를 볼 순 없겠지만 너도 네 정수리를 볼 순 없겠지만 네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여줘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담게 해줘 하긴 때로는 왜곡이 위안이 되기도 ..

횡단보도에서 우는 새/정채원

횡단보도에서 우는 새   갤러리아 명품관과 생활관 사거리에서학동사거리 쪽으로 우회전한다 명품 쪽으로 가자니 생활이 발목을 잡고생활 쪽으로 가자니 치통이 심해진다명품도 생활도 되지 못하는 시詩를 붙잡고새벽까지 이를 악물고 씨름을 해도 어느 쪽도손을 들어주진 않는다이제 그만 해대강대강 해가족들의 응원소리 링 밖에서 들려오고 아침밥도 차려주지 못하고새벽잠에 빠져든 아내를,꿈나라에서 앞치마를 입고 일기를 쓰는 엄마를누가 건져주랴 이쪽과 저쪽 사이새 울음소리 횡단보도가 있다수시로 건너다니는 사람이 있고머릿속만 뒤적이는 사람이 있다신호를 기다리다 그냥 돌아서사잇길로 빠지는 사람 밤새 아래턱이 욱신거릴 것이다   《시와함께》 2024 가을호

피아불식 외 1편/정채원

피아불식彼我不識   적과 아군을 간단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개라고 믿으면 늑대가 되고늑대라 믿으면 개가 됩니다 개와 늑대는 같은 종種입니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먹으면 좋다는수박과 오이는 박과科입니다손바닥을 뒤집지 않아도같은 과科입니다 적이 아군이고아군이 적입니다 구분하는 건 쉽습니다구분할 수 있을까요? 계, 문, 강, 목, 과, 속, 종 적과 아군을 구분하면 추위에 좋다고 합니다같은 조상이지만더위에도 좋다고 합니다     논픽션(Nonfiction)― 김범, 바위가 되는 법   표범처럼 목이 짧아진 기린이 치타를 잡으러 달려간다, 잡힐 듯 잡힐 듯 치타는 죽어라 도망치고. 배가 불룩한 임산부가 되어버린 망치가 누워있다. 나는 치타에게 총을 겨눈 채 10년이 가고 100년이 간다, 아직도 쏘지 못한 채..

낙원 빌

낙원 빌 불빛을 등지고 앉은 내 뒷모습이 보인다 불빛을 마주한 상대방 얼굴을 볼 수 없다 604호 불빛에 먹혀버린 사람은 왼손을 들어 문을 가리킨다 808호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죽은 사람이 있다 곁에는 내 친구들 연락처가 적힌 수첩이 펼쳐져 있고 한 쪽 다리가 부러진 안경도 떨어져 있다 이인삼각 놀이를 하다 너는 발목을 나는 목을 부러뜨렸지 숨이 막혀도 서로 부둥켜안고 놓지 않았어 내가 가장 아끼던 모자는 화장실에 걸린 채 입을 꼭 다물고 305호 문이 잠겨 있다 문 앞에서 나와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는 꼭 내 어릴 때를 닮았구나 엄마의 심부름으로 아스피린을 사오던 나는 20년 후의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이는 나를 피해 비상구 쪽으로 가려 한다 계단들 벽들 문들을 지나 어디에 있든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