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4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16

파타 모르가나* 평설/김윤정, 시작노트/정채원

파타 모르가나* 정채원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 아니, 여름에는 얼음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모래로, 모래바람으로 너를 만들었다, 되도록 빨리 지워지는 너를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신기루 속의 신기루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는 사향고양이는 오늘도 피똥 아니, 커피똥을 싼다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는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일까 하늘에 뜨는 태양과 바다에 뜨는 태양이 서로 마주보며 너, 가짜지? 얼굴을 붉히는 동안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내장을 거칠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모..

특이점의 몽타주, 들끓는 타자/조재룡(문학평론가)

특이점의 몽타주, 들끓는 타자 -문학동네 시인선 126,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해설 조 재 룡 다중의 시선, 다가성의 화면 정채원의 시는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가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괄호를 자주 지워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점묘(點描)와 모형(母型) 등이 주를 이루어 ‘게슈탈트’라고 우리가 부를 무엇을 구현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며 시집은 문자와 문자,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잇고 덧대면서 폭발하듯, 그러니까 예기치 않게 형성되는 조직-구성-짜임을 읽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지워진 괄호의 틈새로 강렬한 이끌림이 자리하는 것은, 행과 행, 연과 연, 시와 시 사이에 연결된 끈..

생활 세계의 ‘너머’를 위한 ‘지금·여기’의 몸부림/김윤정

생활 세계의 ‘너머’를 위한 ‘지금·여기’의 몸부림 -정채원의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문학동네) 김윤정(평론가) 정채원의 네 번째 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에 구현되어 있는 시적 양상은 어느 한 가지로 환원되지 않는 매우 다채롭고 복합적인 것이다. 그의 시에 전면화되어 나타나는 유연하고 폭발적인 상상력은 그 자체로서도 미적 특질을 지니지만 그의 시는 그것이 통어되지 않을 때 범하기 쉬운 가벼움을 비껴가고 있다. 정채원의 시를 지배하는 환유적 이미지들은 그의 시를 세련되고 자유롭게 이끌고 있으되 그의 시는 소위 환유적 시들이 노정하기 마련인 방향 없는 맹목성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즉, 정채원의 시에는 전경화되는 미적 특장들의 이면에 정신적 기저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시의..

삶과 죽음의 볼레로, 이숭원 평론가 -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서평

삶과 죽음의 볼레로 ―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서평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하나의 시작품과 시집은 별과 별자리, 또는 별과 천공(天空)의 관계와 같다. 하늘의 별이 혼자 있을 때는 단순한 별일 뿐 독자적인 의미를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 개의 별이 얽혀 ..

줌렌즈의 좋은 시 「배달사고」정채원/홍기정 문학평론가

배달사고 정채원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벨을 한 번 더 누르는 대신 작은 상자를 두고 떠난다, 택배기사는 8동과 9동 사이로 꿀항아리를 주문한 8동 403호 주인은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내가 입이 쓴가, 입맛이 변했나 꿀맛이 왜 이리 쓸쓸할까, 씁쓸한 해골바가지를 퍼먹으며 ..

탈근대 시뮬라크르의 쓸쓸한 풍경들/오민석

탈근대 시뮬라크르의 쓸쓸한 풍경들 ―정채원 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교수) I. 정채원은 문학이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생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에서 세계는 날것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채원의 ..

-“안 보이는 걸 보려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걸 말하려고”… 세계를 조망하는 ‘시의 눈’

문학동네 시인선, 정채원 시인 네 번째 시집 출간!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조은별 기자 승인 2019.11.20 15:43 “안 보이는 걸 보려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걸 말하려고”… 세계를 조망하는 ‘시의 눈’ [ 사진 출처 = 문학동네 ] 지난 8월 30일, 정채원 시인이 시집 “제 눈으로 제 ..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8)/사랑의 방법 - 정채원의 '장미 축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8) / 사랑의 방법 - 정채원의 ‘장미 축제’ 장미 축제 정채원 변심한 연인을 찌른 당신의 칼날에 장미가 문득 피어났다 칼날을 적시며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꽃잎이 닿는 순간 살도 뼈도 녹아내린다 무쇠덩이도 토막이 난다 쓰러뜨린 얼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