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화상 3

장석남의 「자화상」 감상/이성혁

자화상 장석남  신발은 구겨져 있다가죽 구두옷장의 옷들이 나프탈렌에 절어 있다바지 하나는 벨트가 끼워진 채 냉장고 옆에 쳐박혀 있다 오래된 냉동고가 가늘게 신음한다 무대는 갑자기 꺼져 버렸다나는 꽃을 든 채피를 흘린다 교도소로 납품되는 형벌들죄가 돈이 되는구나큰 죄가 큰 돈이 되는구나죄를 짓는 종사자들시를 짓다니! 멍청이 같으니라고오래된 한탄 속에노을이 목을 베러 온다노을을 목에 감는다 국적란에 붉은 선을 아름답게 긋는 화가시비詩碑의 전문을 긁어 백비를 만드는 시인재생되는 돌의 질감 배경에 깔고 천천히 나는나를 그린다  《POSITION》 2024 여름호 ------------------------------------------------------------------------------------..

비평·에세이 2024.11.10

뒤집히거나 부서지거나 외 1편/정채원

뒤집히거나 부서지거나 정채원 우리는 그곳에 가야한다 칼날 같은 파도를 헤치고 난파선을 타고라도 가야한다 배가 부르고 포만감에 졸음이 쏟아져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순 없다 매 순간 떠나야한다 먼저 도착한 일당이 원주민처럼 텃세를 부리며 천길 벼랑으로 등을 떠밀지 모르지만 그곳에 원주민은 없다 이미 부러진 목이 다시 부러지고 무덤 속에 있던 반쯤 부패한 입술이 깨어나 푸른 립스틱을 바를지라도 우리는 기필코 그곳에 가야한다 그곳은 도착하자마자 이곳이 되고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가야할 이유만 있다 덧칠된 세계 정채원 고흐의 암울한 콧구멍이 여인의 젖가슴에 유두처럼 찍혀 있다 엑스레이를 비추면 파이프를 문 자화상* 아래 여인의 누드 반신상이 밑그림으로 앉아 있다 햇살 비쳐드는 방안에서 웃옷을 벗던 여인 이마..

나를 막지 말아요/정채원, 경향신문

詩想과 세상 나를 막지 말아요 입력 : 2022.06.27 03:00 수정 : 2022.06.27 03:01 김정수 시인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정채원(1951~) 자화상 같은 이 시는 막힘과 뚫림, 멈춤과 흐름의 인생사를 피리와 노래, 춤을 통해 보여준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인생은 기쁨·즐거움의 ‘흐름’과 노여움·슬픔의 ‘멈춤’이 반복된다. 살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 내 삶만 불행한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른 뒤 되돌아보면, 슬픔 속에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