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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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의 재배치/정채원

주름의 재배치 페루인들이 팬플루트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때 이슬람 모스크였으나 지금은 가톨릭교회가 된 스페인의 대성당 초입에서 엘 콘도르 파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달팽이가 되느니 참새가 되겠어요 못보다는 망치가 되겠어요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럴 거예요** 아코디언의 주름이 한껏 펼쳐질 때마다 내 안에 접혀 있던 주름들이 바람소리와 함께 날개를 펼치곤 했다 이미 오래 전에 떠난 줄 알았으나 떠나지 못하고 깊숙이 차곡차곡 접혀 있던 시간들이 노랫말과 만나 먼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2 천 년 전 나스카 사막에 새겨놓은 거대 지상화처럼 쉽게 해독할 수 없는 주름들, 열대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금강앵무를 메마른 사막에 새겨놓은 까닭을 더듬더듬 헤아려 보았다 ..

바닷가 시계방/조창환 시집

텅 빈 입 입 큰 잉어가 연못에 똑바로 서서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향해크고 넓은 입을 벌린다텅 빈 빛은텅 빈 입으로 들어가고오기도 전에 사라진 일들도텅 빈 입으로 들어간다아득하고 캄캄하고 아픈과거도, 미래도영세불망(永世不忘)의 기억도텅 빈 빛 되어 들어간다텅 빈 입 안으로 바닷가 시계방 은퇴하면 작은 시계방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솔숲 언덕길에 작고 희고 동그란 자갈 깔린 길 밟고 올라가면 거기 머리 허연 늙은이가 앉아 편안히 졸고 있는 모습 그려 보곤 하였다. 브람스의 현악 6중주 제1번 2악장의 느리고 은은한 도입부가 흘러나오는 조그만 시계방 있어 거기가 내 놀이터 되었으면 하는 호사스런 꿈꾸어 본 적 있었다. 거기서는 바늘 하나짜리 시계만 팔아야지...

책소식 2026.10.15

사자가 뱀처럼/이재훈

사자가 뱀처럼 이재훈 당신은 이름이 없어요. 탯줄은 있는데 아우성이 없어요. 바람이 부는데 소리가 없어요. 깊이가 없는 어둠이죠. 새벽 다섯 시를 만나요. 무릎을 꿇고 환하고 어지러운 말을 했어요.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구름만 봐요. 도망간 사랑을 부르지 않아요. 그냥 불러보는 거예요. 당신의 귓불에는 가닿을 수 있잖아요. 한숨으로 변신하고 싶어요. 안식을 바라지 않아요. 미치도록 어깨를 세워 일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싶어 흙을 만졌어요. 우정의 시간을 물 위에 쓰고 흘려보냈어요. 당신의 비밀을 훔치려고 노래를 불렀어요. 영혼을 부르는 가장 빠른 길은 두려움이죠. 이런 꽃잎. 저런 열매. 저어기 고여 있는 새벽, 웅크리고 울고 있는 어린 염소. 매일 낭비하는 신파. ..

가구/박소란

가구 박소란 이 탁자가 언제부터 있었나더듬어 보니북가좌동 원룸 살 때 있었지 그전에 옥탑 살 때도,아니지 서울 올라오기 전에도 있었다아직 살아 있는 엄마가 유리 상판에 쌓인 먼지를 훔치며참 밝다 밝아, 중얼거리던 일이 꿈인 듯 선명하고그냥 꿈일지도 모르고나는 탁자 앞에 앉아 밀린 숙제를 했지 밤늦게 아르바이트 끝내고 와서는 엄마가 끓여준 라면도 먹었지그럴 때면 곧잘 다리를 잘름거리던 낡은 탁자아 어지러워이 탁자가 지금까지 있었나이제는 버릴 결심을 하고오래된 가구는 버려야 마땅하므로 싸구려라면 더더욱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엄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그때의 내가 누구를 살릴 수 있는 것도아니지그렇지만 나는 망설이고버릴 결심은 어렵고복잡한 마음을 눈치챈 탁자는 거실 바닥에 불쑥 주저앉아 버려나도 ..

나는 부적절한 빛/정선 시집

지금, 연두 연두가 수의를 벗었다 옥죄다,를 생각하면 자꾸만 치밀어빨간 문어가 돼 연두는 엎질러진 마음을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킨 빛 베란다 앞까지 도착한 눈웃음묵은 걱정 근심이연두로 물들고 있다지난해 몰래 숨겨 놓은 안반데기에도 연두가 꽃핀다 주머니엔 부정의 돌멩이들이 늘어가고식은 사랑은 꽃으로도 데워지지 않지 하나 연두는 질리지 않는 얼굴곁에 두고 싶은 안식 연두가 내 목덜미를 감싸따뜻한 이프타르*의 첫술을 뜬다 *이슬람교도가 라마단 단식 기간에 일몰 후 처음 먹는 식사.

책소식 2026.10.07

울음은 안녕하신가요/장순금 시집

울음은 안녕하신가요 장순금 땅거미가 몸을 모로 눕는 동안 한낮의 긴 계단이 풀어져 흘러 집 나간 울음은 언제 돌아왔나요풀잎 한 장 없는 몸이 추워향내 나는 꽃술 속으로 절정을 옮기더니 인기척도 없이언제 축축한 내 속으로 들어왔나요 천년 삭힌 먹구름이 회오리처럼 달려지구 몇 바퀴 숨차게 돌아온울음은내 방 아랫목이 편하던가요 오래된 서랍 속도 벗어 둔 신발 속도 출렁인과즙처럼 달달한 울음이참았던 천둥 풀어 봉인된 경계를 젖히고눈물꽃 피는 빈 방으로 온 버려진 울음 하나 문고리에 걸어두고안녕?함몰된 울음에게 안부를 물어요

책소식 202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