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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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의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감상 / 박연준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이기리(1994~)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 단 한 그루의 보호수단 한 사람의 손길단 한 마리의 추격단 한 가지의 진실단 한 마디의 거리단 한 계절의 온기단 한 시절의 패배단 한 소절의 의미단 한 자리의 물길단 한 가닥의 변명단 한 번의 장난단 한 권의 자살단 한 짝의 마음 남아도는 실마리가 없어서우리는 뜻 모를 병명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 (후략) ............................................................................................................ 누군가로부터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때의 시간은 거리다. 당신과 나 사이, 우리 ‘사이’..

비평·에세이 2026.09.05

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조정인

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 조정인  사과나무 사이로 그가 사과를 붉게 물들이며 계절처럼 지나간다 유월 연록빛 잎사귀를 배불리 갉아 먹고 그 그늘에 잠든 감나무 애벌레의 환한 낮잠을 굽어보는 나무에 깃든 그​ 시력을 잃어가는 늙은 화공의 빈 캔버스와 청색 물감, 붓끝에 기다리는 순정  당신이 미풍 속을 걷다가 스치는 바람결에 불현듯 솟구치는 감사의 정이 향하는​ 노을 비낀 그곳은 그의 거처​ 말, 나귀, 소, 개… 풀여치… 말 못 하는 것들 눈망울에 얼비치는 젖은 침묵​ 봄 흙을 밀치고 자랑스럽게 고개를 든 새싹의 해말간 얼굴에 있는 어리디어린 그​  빛과 어둠 사이 모든, 있는 것들에 깃든 그러나 또한 어디에도 없는,​  그의 이름은 무(無)​  최초의 적막……  대지의 숨, 시공간의 맥박으로 그..

방문객/정현종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것이다 ㅡ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집 《광휘의 속삭임》

늑대처럼 싱싱하게 울고 싶었다/문정희 시집

말뚝 광배를 두르기 위해서는부처도 뒤통수에 말뚝을 박아야 하나 국립박물관 사유의 방절대 고요 속에 턱 괴고 앉은부처의 시야를 어슬렁거리다가뒷머리에 꽂힌 말뚝불끈 솟은 섬광 하나를 보고 말았다 절망 깊어 피 흐르는 무릎으로바닥을 기어 찾아간 방부처보다 말뚝이 보인 날 비로소 부처를 보았다고 해야 하나 저게 무엇일까누가 꽂았을까 피 엉긴 손으로내 뒤통수에 꽂힌 말뚝을 만져 본다사방을 휘둘러본다 말하는 돌 날마다 길을 잃었다 바람 속에서알몸으로 헤매면서갇혔다 문정희 시집《늑대처럼 싱싱하게 울고 싶었다》,민음의 시 339

책소식 2026.09.02

크리넥스/안정희 시집

크리넥스 일부를 보여 주었다전부를 보여 주기 위해 쓰러진 모습은시작하기 좋았다 노르웨이의 숲을 뽑아부대끼던 가지들의 소리를 톱질하고모양과 향이 상자 안에서평범과 인내를 저지르며가지런해지는데 고슴도치가 와다다 달려와서크리넥스를 뜯어 먹는다내 손도 뜯어 먹는다손끝이 온몸을 흔드는데 윤기 나는 가시를온몸에 박고 당신은나를 향해 웃는다 너의 웃음에 대해나의 손끝에 대해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하나도 말하지 않기 위해 포에티카 안으면 혹 잃을까닿으면 혹 닫을까 안았을 때 그녀의 숨소리에서 먼지 냄새가 난다 원한 것을 얻어도얻은 것이 원했던 것이 되지 않았다 안정희 시집 《크리넥스》, 파란시선 0184

책소식 2026.08.29

정채원의 「가장 가까운 비」 읽기/안차애

가장 가까운 비/정채원​​​경험 많은 다이버는 종종 바다를 과소평가한다무심코 던진 농담 하나로 수십 년 관계가 무너지고서둘러 야간주차를 하다 새 차 옆구리를 깊숙이 긁었다​가장 가까운 비는 27km 떨어져 있다는예보, 머지않아 닥칠 것이다번개든 폭풍우든​과신하지 말아요익사하지 말아요추락하지 말아요​아침이면 지하철을 타고저녁이면 퇴근 버스를 타고내릴 수 없는 역은 그냥 지나치고집이 아닌 곳에선 하차하지 않는 사람들​일상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사람들고개를 숙이고 쳇바퀴를 돌아도낮에 통화한 친구의 심장이 한밤중에 갑자기 멎고싱크홀로 한순간 빨려 들어간 장미정원이 있다​비는예보보다 훨씬 더가까이 있다​멀리 밤바다는 달이 없어도 출렁이고​내일 일정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드는 그대새벽 알람에 깨어나면등껍질 반짝이는 벌..

비평·에세이 2026.08.19

김보나의 「나의 순정 만화」 읽기/안차애

이달의 좋은 시 읽기, 나의 순정 만화/김보나​​​어른이 되면 멋진 연애를 하고 싶었어.배낭을 메고 떠난 유적지에서 우연히 입을 맞추거나,흔들리는 케이블카에 단둘이 갇혀 두근대며 잠시 손을 잡는 두사람…… 같은(아무튼, 안경을 벗고 펑! 미인으로 변했다는 설정)​어른이 되면 암이 생길 줄 몰랐어.종양이 생긴 갑상샘 반쪽을 자르게 될 줄도,쇄골 위에 툭 튀어나온 흉터가 빨갛게 자리잡을 줄도.​30대에 연애를 하게 될 줄 몰랐어.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사범대에 갔었어. 만약에 진짜로선생님이 되었다면, 이듬해 봄에 애들이 이렇게 외치곤 하겠지.―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그럼 나는 자, 책 펴라, 책상을 탁탁 치고,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한 사람을 떠올릴 거야.​정수리에 자라나는 흰머리를 검게 ..

비평·에세이 202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