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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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권태/박진형

프랑스식 권태 권태로울 수밖에 없어 주니가 납니다나는 곧 당신이고 당신은 나입니다 우리는 몸서리치게 완벽한 공모자서로의 허기를 감각으로 읽고숨겨진 감정의 틈을 서로 메우며 살아갑니다 다른 누군가와 권태를 나눌 권리를 준다 해도나는 다시 거짓말을 하고모든 것을 빈틈없이 숨기겠습니다 나와 닮은 당신당신과 나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져가장 완전한 관계를 꿈꾸며 서로를 스칩니다 권태는 파문입니다 그립다는 것은 몸속에서 부풀어주니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당신이 없어 온몸으로 앓아 낸 징후입니다 당신의 살갗에 세상의 모든 싫증이 깃들어 있습니다까치발로 잡으려 해도 닿지 않을 때선반 위의 일기장과 그간 오간 편지가조용히 비밀을 누설합니다 꽃잎에 스며든 혈흔처럼늦은 봄 권태의 끝은 묘지입니다나는 당신의 부재를 남겨둔 채 ..

문지방 청소부/정채원

문지방 청소부 정채원 문지방 바깥쪽에선 벚꽃이 만발하고 안쪽에선 눈발이 흩날린다. 한겨울에도 내 창문 앞에 라일락 한 그루를 가져다 놓던 그가 사라지자 창문도 서서히 지워졌다. 창문이 아주 지워지면 사시사철 창밖 꽃나무를 바라보던 나도 언젠가 지워질 테지. 스포츠센터 지하 돼지갈비집 주차요원은 오늘도 주차장 입구 문지방을 지키고 있다. 연말모임 끝내고 취객들 돌아가는 자정이 되도록 문지방을 지키고 있다. 막내가 대학 등록금 문지방을 잘 넘도록 김씨는 야근을 자원했다지. 막내가 대학졸업 후 직장을 잡으면 저 문지방도 서서히 지워지리라. 그녀는 책에 묻혀 살았다. 하루에 시집을 한 권씩 읽고 편지를 쓰곤 했다. 철학자나 물리학자의 책에 취한 날은 문지방을 수시로 건너다녔다. 이 별과 저 별에 동시에 존재하..

여기, 저기, 허기/정채원

여기, 저기, 허기 그날 피는 허기를 쉽게 지우지 못했다아침을 굶고 피검사를 한 오후나주곰탕 한 그릇을 비우고도 제과점 꿀 바른 크루아상은뜨거운 아메리카노 속으로자꾸 부서져 내리고,나는 주변을 어지럽히고떠나긴 싫었는데바닥으로 자꾸 부서져 내리고,창밖 긴 동체를 몇 번 시도 끝에야 간신히 돌리는상조버스엔 누가 실려 가는지가로수 은행나무가 손 흔들며자꾸 떨어뜨린 건어느 틈에 노랗게 바래버린 자신의 지난날들창가의 젊은 한 쌍은 서로를 향해 번갈아 포즈를 잡았다지치지도 않고 셔터를 눌렀다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워도어느 틈에 달아나는 젊음은가둬놓을수록 더 빨리 달아나는데한 모금 빨다 주루룩 흘려버린꿀처럼 기포처럼 달콤한 인생은어디에 갇힌 채 지워지고 있나호박 목걸이 속에 갇혀 있는 벌처럼 허기를 지우지 못하고..

방문객/정현종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것이다 ㅡ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집 《광휘의 속삭임》

물빛의 잠/박수현

물빛의 잠 박수현 그날 나는 덜컥물을 품어 천천히 자란다는 돌,수옥(水玉)으로 만든 침대를 샀다 수백 년을 품은 돌의 온기가겨울 생가지처럼 갈라졌던 잠을다시 잇게 해줄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밤이면 미납고지서처럼 채근하던 통증이왼쪽 무릎에서 민달팽이처럼 스멀대며시간의 연골 사이를 더듬었다슬개골이 동강나던 정류장과 119의 사이렌 소리입원실 LED 아래 굴러가던 철제 바퀴 소리가내 잠을 물방울처럼 흩뿌리곤 했다 나의 잠은 아직돌처럼 깊어지지 못한 물결 같아손끝만 스쳐도 쉽게 흔들린다 수옥이 채굴된다는 어느 먼 지하,물빛 숨이 깊어지는 그곳까지달빛이 수맥의 발목을 더듬듯 스민다면일렁이던 내 잠도 아주 천천히다시 아슴아슴 물빛으로 자라날까 - 『한국시인』 2026년 하반기 제11호

이기리의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감상 / 박연준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이기리(1994~) 비좁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는 단 한 그루의 보호수단 한 사람의 손길단 한 마리의 추격단 한 가지의 진실단 한 마디의 거리단 한 계절의 온기단 한 시절의 패배단 한 소절의 의미단 한 자리의 물길단 한 가닥의 변명단 한 번의 장난단 한 권의 자살단 한 짝의 마음 남아도는 실마리가 없어서우리는 뜻 모를 병명으로 떠돌고 있었습니다. (후략) ............................................................................................................ 누군가로부터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때의 시간은 거리다. 당신과 나 사이, 우리 ‘사이’..

비평·에세이 2026.09.05

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조정인

그가 계절처럼 지나간다 조정인  사과나무 사이로 그가 사과를 붉게 물들이며 계절처럼 지나간다 유월 연록빛 잎사귀를 배불리 갉아 먹고 그 그늘에 잠든 감나무 애벌레의 환한 낮잠을 굽어보는 나무에 깃든 그​ 시력을 잃어가는 늙은 화공의 빈 캔버스와 청색 물감, 붓끝에 기다리는 순정  당신이 미풍 속을 걷다가 스치는 바람결에 불현듯 솟구치는 감사의 정이 향하는​ 노을 비낀 그곳은 그의 거처​ 말, 나귀, 소, 개… 풀여치… 말 못 하는 것들 눈망울에 얼비치는 젖은 침묵​ 봄 흙을 밀치고 자랑스럽게 고개를 든 새싹의 해말간 얼굴에 있는 어리디어린 그​  빛과 어둠 사이 모든, 있는 것들에 깃든 그러나 또한 어디에도 없는,​  그의 이름은 무(無)​  최초의 적막……  대지의 숨, 시공간의 맥박으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