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전체 글 1572

우는 빵/이대흠

우는 빵 이대흠 빵이 새카맣게 탔다 미워할 일 없이 미워하기만하다 떠난 사람처럼 서운하다 갚을 길이 사라지는 건사이에 낭떠러지가 발생하는 것같은 기분 빵을 굽다가 흘린 밀가루처럼생각을 떨어뜨릴 때가 있다빵이 익어간다잊어간다 안전이란 말의 안과 전 사이에크레바스가 있다낭떠러지를 만들지 않으려고삶은 외자라고 매끈한 반죽을 만질 때마다다짐했다빵을 살려야지 나는 빵을 잘 모르는 사람 죽은 사람은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지나갑자기 사라진다 빵을 구우면서도 빵을 모르는 것처럼삶이란 빵이 새카맣게 탔다크랙이 간 겉면에서 안을들여다본다 거기 죽은 사람 있어요? 알 수 없는 빵 속을 갈라본다하얀 빵 속과 구멍들사이에서 죽은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계간 《시와 사람》 2026년 가을호----..

임지은의 「기본값」 평설 / 이경수

기본값 임지은 다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 이 년 만에 새로 나온 작가의 책을 주문하며 밥 먹고 글만 쓰나 봐, 생각했다​ 친구가 말했다, 너도 밥 먹고 시만 쓰잖아​ 그건 내가 아파서, 시에 정신을 팔고 있지 않으면 아픈 것들이 너무 또렷하게 느껴져서​ 그럼 시인들은 모두 아픈 존재들인 걸까? 친구는 답해줄 수 없고 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n 개의 삶을 사는 강혜빈 시인을 만났다 대학원 수업이 끝난 후 짬을 내 카페에서 시를 쓰고 포토샵 작업까지 마친 그녀는 네 번째 자아로 앉아 있었다 ​저도 가끔은 아프기 위해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보통이 보통을 넘어서고 있는 시대에는 열심이 기본값이 된다 그렇게 보통이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을 한 개로 줄..

비평·에세이 2026.10.29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김선향 시집

80cm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아니 반쯤 뜬 눈동자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네 어미 보티늉은 네가 누운 작은 관에털신과 장갑을 함께 넣었단다영상통화로 입관식을 지켜보던 네 외할머니는베트남 하띤에서 오열하는구나나는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얼음장 같아 얼른 손을 뗐지만손바닥엔 화인이 찍히고 말았구나 쓰는 여자들의 방 어머니 집에 오니 거실은 물론이고안방까지 난방을 끄셨다아직 입춘이 지났을 뿐인데어머닌 겨우내 이렇게 지내신 셈인가따뜻한 곳은 내가 머무는 방뿐식탁에 노트북을 펼치자손가락이 곱아끙끙거리며 교자상을 방으로 옮긴다시를 얻으려 소설을 낳으려 저마다토지문화관..

책소식 2026.10.27

액체의 말/함기석

액체의 말 함기석 합동 위령제가 끝나고 물의 공원을 걷고 있다 빛이 속삭였다남은 자는 모두 재가 되리라! 어떤 봄은 짐승의 비린 생간, 물이 낮게 고백했다 몸빛이 아름다운 살구나무그늘 밑에서 마음이 뿔에 찢겨 우는 저 노인 모든 걸음은 첫 걸음마지, 흙이 뱉는 침묵의 말씀에남은 날들이 광채를 띠어 더 아프리라 이파리는 수천 만장挽章, 손이 되어 공중에 나부끼고뿌리 끝에서 물관 타고 허공으로 빠져나가는 20세기 21세기 22세기…… 시간이 다시 최초의 태아가 될 부활의 시간 —계간 《딩아돌하》 2026 가을호-----------------------함기석 / 충북 청주 출생. 1992년《작가세계 》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공원』『오렌지 기하학』..

매일매일 아침이/정채원(울산제일일보 2026.10.16, 이시향 시인)

매일매일 아침이 / 정채원울산제일일보승인 2026.10.15 20:22밤은 깊고 아름답다그리고,그러나매일매일 아침이 있어얼마나 다행인가------------------------------------------------------------------------------------정채원 시인의 첫 디카시집 ‘열대야’를 읽으며 오래 머문 작품들은 선명한 사진 기호보다 오히려 흐릿한 사진이었다. 무엇을 찍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이미지, 어둠과 여백이 많은 사진 기호들이 자꾸 눈을 붙잡는다. 사진을 보고 문자를 읽고, 문자를 읽은 뒤 다시 사진을 보게 된다.정채원 시인의 디카시에서 사진은 언술을 설명하는 배경이 아니다. 사진 기호와 문자기호가 만나 서로의 의미를 흔들고 넓힌다. ‘열대야’에서 사진 ..

디카시 202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