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전체 글 1569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김선향 시집

80cm 너의 반쯤 감은 눈동자아니 반쯤 뜬 눈동자너를 잊을 수 없게 하네나를 견딜 수도 없게 하네어린이집에 간 지 겨우 닷새째이불을 씌우고 베개를 올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너의 발버둥과 파닥거림이 이어지던 14분네 어미 보티늉은 네가 누운 작은 관에털신과 장갑을 함께 넣었단다영상통화로 입관식을 지켜보던 네 외할머니는베트남 하띤에서 오열하는구나나는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얼음장 같아 얼른 손을 뗐지만손바닥엔 화인이 찍히고 말았구나 쓰는 여자들의 방 어머니 집에 오니 거실은 물론이고안방까지 난방을 끄셨다아직 입춘이 지났을 뿐인데어머닌 겨우내 이렇게 지내신 셈인가따뜻한 곳은 내가 머무는 방뿐식탁에 노트북을 펼치자손가락이 곱아끙끙거리며 교자상을 방으로 옮긴다시를 얻으려 소설을 낳으려 저마다토지문화관..

책소식 10:50:11

액체의 말/함기석

액체의 말 함기석 합동 위령제가 끝나고 물의 공원을 걷고 있다 빛이 속삭였다남은 자는 모두 재가 되리라! 어떤 봄은 짐승의 비린 생간, 물이 낮게 고백했다 몸빛이 아름다운 살구나무그늘 밑에서 마음이 뿔에 찢겨 우는 저 노인 모든 걸음은 첫 걸음마지, 흙이 뱉는 침묵의 말씀에남은 날들이 광채를 띠어 더 아프리라 이파리는 수천 만장挽章, 손이 되어 공중에 나부끼고뿌리 끝에서 물관 타고 허공으로 빠져나가는 20세기 21세기 22세기…… 시간이 다시 최초의 태아가 될 부활의 시간 —계간 《딩아돌하》 2026 가을호-----------------------함기석 / 충북 청주 출생. 1992년《작가세계 》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공원』『오렌지 기하학』..

매일매일 아침이/정채원(울산제일일보 2026.10.16, 이시향 시인)

매일매일 아침이 / 정채원울산제일일보승인 2026.10.15 20:22밤은 깊고 아름답다그리고,그러나매일매일 아침이 있어얼마나 다행인가------------------------------------------------------------------------------------정채원 시인의 첫 디카시집 ‘열대야’를 읽으며 오래 머문 작품들은 선명한 사진 기호보다 오히려 흐릿한 사진이었다. 무엇을 찍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이미지, 어둠과 여백이 많은 사진 기호들이 자꾸 눈을 붙잡는다. 사진을 보고 문자를 읽고, 문자를 읽은 뒤 다시 사진을 보게 된다.정채원 시인의 디카시에서 사진은 언술을 설명하는 배경이 아니다. 사진 기호와 문자기호가 만나 서로의 의미를 흔들고 넓힌다. ‘열대야’에서 사진 ..

디카시 2026.10.16

주름의 재배치/정채원

주름의 재배치 페루인들이 팬플루트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때 이슬람 모스크였으나 지금은 가톨릭교회가 된 스페인의 대성당 초입에서 엘 콘도르 파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달팽이가 되느니 참새가 되겠어요 못보다는 망치가 되겠어요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그럴 거예요** 아코디언의 주름이 한껏 펼쳐질 때마다 내 안에 접혀 있던 주름들이 바람소리와 함께 날개를 펼치곤 했다 이미 오래 전에 떠난 줄 알았으나 떠나지 못하고 깊숙이 차곡차곡 접혀 있던 시간들이 노랫말과 만나 먼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2 천 년 전 나스카 사막에 새겨놓은 거대 지상화처럼 쉽게 해독할 수 없는 주름들, 열대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금강앵무를 메마른 사막에 새겨놓은 까닭을 더듬더듬 헤아려 보았다 ..

바닷가 시계방/조창환 시집

텅 빈 입 입 큰 잉어가 연못에 똑바로 서서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향해크고 넓은 입을 벌린다텅 빈 빛은텅 빈 입으로 들어가고오기도 전에 사라진 일들도텅 빈 입으로 들어간다아득하고 캄캄하고 아픈과거도, 미래도영세불망(永世不忘)의 기억도텅 빈 빛 되어 들어간다텅 빈 입 안으로 바닷가 시계방 은퇴하면 작은 시계방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솔숲 언덕길에 작고 희고 동그란 자갈 깔린 길 밟고 올라가면 거기 머리 허연 늙은이가 앉아 편안히 졸고 있는 모습 그려 보곤 하였다. 브람스의 현악 6중주 제1번 2악장의 느리고 은은한 도입부가 흘러나오는 조그만 시계방 있어 거기가 내 놀이터 되었으면 하는 호사스런 꿈꾸어 본 적 있었다. 거기서는 바늘 하나짜리 시계만 팔아야지...

책소식 2026.10.15

사자가 뱀처럼/이재훈

사자가 뱀처럼 이재훈 당신은 이름이 없어요. 탯줄은 있는데 아우성이 없어요. 바람이 부는데 소리가 없어요. 깊이가 없는 어둠이죠. 새벽 다섯 시를 만나요. 무릎을 꿇고 환하고 어지러운 말을 했어요.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구름만 봐요. 도망간 사랑을 부르지 않아요. 그냥 불러보는 거예요. 당신의 귓불에는 가닿을 수 있잖아요. 한숨으로 변신하고 싶어요. 안식을 바라지 않아요. 미치도록 어깨를 세워 일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싶어 흙을 만졌어요. 우정의 시간을 물 위에 쓰고 흘려보냈어요. 당신의 비밀을 훔치려고 노래를 불렀어요. 영혼을 부르는 가장 빠른 길은 두려움이죠. 이런 꽃잎. 저런 열매. 저어기 고여 있는 새벽, 웅크리고 울고 있는 어린 염소. 매일 낭비하는 신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