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3시집 일교차로 만든집 4

시인의 말/정채원

내 몸속에 다른 생물이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어언 20년이 다 돼간다. 아니, 훨씬 더 아득한 날부터다. 몸 안의 생물이 조종하듯 나는 한밤중에도 물가로 갔고 들판을 헤매었으며 바람 속에서 꽃을 꺾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언덕을 기어오르다 날이 밝아오곤 하였다. 몸 안의 그 생물은 내 고독과 불안과 슬픔을 먹고 자랐다. 자라면 또 알을 낳았고 유충은 자 라면서 더 많은 먹이를 필요로 했다. 그를 품고 살며 늘 추웠다 더웠다 한다. 얼었다 녹았다 하며 하루하루 모호 하게 메말라간다. 여러 겹으로 안전하게, 안전하게 부서져 간다. 2014년 4월

‘짝눈’의 시선과 ‘패치워크’의 시법/이성혁(문학평론가)

‘짝눈’의 시선과 ‘패치워크’의 시법(서평) 이성혁(문학평론가) 1 정채원의 󰡔《일교차로 만든 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좀처럼 평온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심연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심연을 향해 있는 계단을 과감하게 내려간다. 그것은 지상으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지옥을 기어코 보겠다는 의지가 이끄는 것일까? 그러한 시인들이 있다. 지상에서 지옥의 문을 기어코 찾아내고는 지옥으로 내려가 시를 쓰려고 하는 영웅적인 의지를 품은 시인들이. 하지만 정채원 시인은 그러한 영웅적인 시인은 아닌 듯하다. 심연으로의 하강은, 「시인의 말」에서 시인 자신이 말하듯이, “내 고독과 불안과 슬픔을 먹고” 자라는 “몸 안의 그 생물”의 조종에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시인의 ..

시집 해설/암흑의 타자 또는 에로스의 덩어리/황현산(문학평론가)

암흑의 타자 또는 에로스의 덩어리 황 현 산 바닷가에 조가비가 널려 있다. 한 아이가 그 조가비를 줍고 있다. 아이는 가능한 한 아름다운 조개껍질을 고른다. 모양이 여느 조개껍질과 닮지 않은 것, 색깔이 좀 더 다채로운 것, 파도에 부서지고 닳아 작고 하얀 바둑알처럼 보이는 것, 아이는 조금 다른 조가비를 고르려 하는데, 문득 어떤 조개껍질도 다른 조개껍질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른 조개껍질과 똑같은 조개껍질은 없다. 조개껍질은 저마다 특별하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조가비들을 버리고 망연히 서 있다. 그는 조개껍질들을 분류할 수도 없고 선택할 수도 없다. 조개껍질 하나하나가 그에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장막이 되었고,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되었다. 철학자 아이는 산과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