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139

나의 시, 나의 시론/정채원

나의 시, 나의 시론 / 정채원변검쇼 1 정채원오늘은 석민이지만어제는 명호였지요원래는 영섭이예요지금 당신에게 영섭이가 말하는 거예요영섭이의 말은 믿어도 돼요석민이는 늘 쥐색 정장 차림바지 주름 칼날같이 세우고 다니는 사람명호는 무릎 튀어나온 코르덴바지에담뱃재 희끗희끗한 티셔츠 바람회칼로 반대파의 목을 따고도 귀갓길말기 암 어머니 전화 목소리에 귀가 젖는 사람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에게맘 놓고 속내 다 털어놓듯비밀처럼 꽁꽁 숨긴 당신의 아픔다 털어놓아도 돼요, 영섭에게이제는 당신의 눈빛만 보아도 다 알아듣는 영섭에게석민이도 아니고명호도 아닌영섭이가 지금 말하는 거예요당신을 진정 사랑해요아니, 결코 널 용서할 수 없어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문 닫을 시간입니다널 죽여 버릴 거야, 오, 오…… 당신..

비평·에세이 2025.04.17

정채원의 「상처의 심도」/김윤정 해설

상처의 심도정채원  표피만 탔을까더 깊은 속까지 타버린 건 아닐까불탄 소나무 껍질에서 송진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물관까지 탔다면 포기해야 한다 모든 상처를 눈물로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데 심도의 문제라지만사랑의 심도절망의 심도그 보이지 않는 눈금을 무엇으로 잴 수 있나 산불이 남긴그을음의 높이와 넓이가 각기 다른 숲속물관을 따라 기어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물은 기억의 중력보다 힘이 세다 뿌리만 남았던 아카시아에도 새싹이 자라나고거북등처럼 타버린 소나무에도 연두 바늘잎이 나오는새봄이 왔다지만 아직도 계속 송진만눈물처럼 흘리고 있는 나무들이 곁에 있어쉽게 새봄이라고 소리치지 못한다 지나간 불길을 지우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시와함께》 2022년 겨울호---------------------------..

비평·에세이 2025.04.11

정채원의 「Beyond The Scream*」 해설/ 김재홍

Beyond The Scream* 정채원  벽장에 넣어둔 가방이 새벽까지 뒤척거린다 가방 안에는 백 년 묵은 얼굴뭉크 전시회의 입장권카푸치노 두 잔의 영수증 버려도 버려지지 않고 이따금 기지개를 켜는기억의 올이 지금도 풀리고 있는지 휘갑치기, 사슬뜨기더 이상 올이 풀리지 않게 바세린을 발라 둔 단면이 있다자꾸 갈라지고 터져 피 흘리는끝단을 쓰다듬는 밤 절규(Scream) 이후귀를 틀어막아도 하늘 너머 또 어떤 하늘이꿈틀거리며 밀물지고 있는지  한 바늘씩 혹은 두 세 바늘 건너휘갑치기, 사슬뜨기더 이상 올이 풀리지 않게  * Edvard Munch 전시회  ------------------------------------------------------------------------------------..

비평·에세이 2025.04.05

진은영의 「있다」 해설 / 고봉준

진은영의 「있다」 해설 / 고봉준  있다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 개의 빛이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깨진 나팔의 비명처럼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집 ..

비평·에세이 2025.03.26

[자작시 해설] 집에 가자 / 이화은

[자작시 해설] 집에 가자 / 이화은  집에 가자  이화은  우는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 하면 뚝 울음을 그친다집은 울지 않아도 되는 곳인 줄 아이는 알았을까 전학해 온 지 한 달 된 학교앞에 놓은 시험지는 깜깜하고 깊었다심해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빈 시험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선생님이그래 눈물만한 답은 없지 내 시는 아직도 눈물만한 답을 얻지 못해 헤매고 또 헤맨다 객짓밥이 유난히 시린 날은 집에 가고 싶었다집에 가자 집에 가자이 말을 두텁게 덥고 잠들곤 했다 신접살림 집에 딸을 두고 돌아서며 어머니는 몇 번이나이제는 여기가 네 집이다 못을 박았다그래도 나는 자주 집에 가고 싶었다우는 아이 손을 잡고 집에 가자 달래면서도나도 내 집에 가고 싶었..

비평·에세이 2025.03.22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김태형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 ​김태형 ​ 며칠 전 작은 구름 하나가 지나간 곳을 찾아가는 중입니다풀을 뜯으러 가고 있습니다몇 방울 비가 내린 자리에 잠시초원이 펼쳐지겠지요이름을 가진 길이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도이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물어봅니다이름이 없는 길을한 번 더 건너다보고서야언덕을 넘어갑니다머리 위를 선회하다 멀찌감치 지나가는 솔개를이곳 말로 어떻게 부르는지 또 물어봅니다언덕 위에 잠시 앉아 있는 검독수리를하늘과 바람과 모래를방금 지나간 한 줄기 빗방울을끝없이 펼쳐진 부추꽃을밤새 지평선에서부터 저편으로건너가고 있는 별들을그리고 또 별이 지는 저곳을여기서는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어봅니다어떤 말은 발음을 따라 하지 못하고개울처럼 흘러가는 소리만을 들어도 괜찮지만이곳에 없는 말을내가..

비평·에세이 2025.02.28

[조용호의 문학공간]"그들의 왕이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https://www.kpinews.kr/newsView/106559909632153    8년 만에 펴낸 장석남 새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전통 서정시에서 '벼락 같은' 서정시로 나아가는초기의 현실 고민으로 돌아와 더 깊어지고 신랄한완숙한 시편들이 주는 감동과 현실을 돌아보는 전율그렇지 않고는 삶 내내 앓아온 그리움이 꼭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 찬란히도 타들어가며 흐르던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육지로 떠나고 할머니와 섬에 남아 노을을 바라보던 소년 시절을 시인은 지나왔다. 그는 "대여섯 살 때부터 집 뒤 언덕에서 날마다 보아왔던 노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늘의 한때만은 아니었던 듯"하다면서 "진홍과 보라가 뒤섞여 어디론가 고요히 흘러가기도 하고 타들어가기도 하..

비평·에세이 2025.02.10

하재연의 「여름 판타지」 감상/홍용희

2024 Cultura Awards 오늘의 시   여름 판타지 하재연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시작되는 대본을 쓰는창밖으로는 눈이 쏟아진다 클리셰가 난무하는장르 드라마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열려 있는창문틀이 육체처럼 삐걱거리고 있다나의 시간들이 새어나가고 있다 이십 년 후의 네가 이상하게 아름다워서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가며결말을 준비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여름의 파도소리는 시작된다 ​지구의 건너편 반구에서부터기억처럼 도래하는 방식으로  ㅡ《청색종이》2023 여름호  ------------------------------------------------- 하재연의 「여름 판타지」의 낭만적 공간 서사이다. 여기에 시간성은 없다. 그래서 시적 ..

비평·에세이 2024.12.30

이성복의 「문신」 감상/유진

문신 이성복  당신을 따라서 나도 모르게 천착 하였습니다. 당신이 슬퍼 할 줄알면서도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내 손에 묻은 당신의 피를 보았습니다 당신에게서 당신에게로 가는 것들을 가로막고서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 당신 가슴에 내가새긴 끔찍한 문신이었습니다.  -------인내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며, 함께 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그분, 세상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참된 성품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 그분을 따라서 천착(穿鑿)된 사랑입니다.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움입니다. 확인하려하면 할수록 외로워지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내 손에 묻은 당신의 피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새긴 피의 문신이었습니다...

비평·에세이 202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