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498

새의 구두/손음

새의 구두 손 음 여섯 살의 구두를 오래 신고 있었네인생은 여섯 살외눈박이 그믐이 혼자 놀러 왔네여섯 살이 많이 늙었네또각또각 또각또각나는 언제 잊으려나나는 언제 잠드려나나는 시를 쓰고나는 새를 쓰고 간밤의 꿈을 가지고 놀러 갔다흰 사과푸른 언덕귀가 없고입술이 없고그래도 다행이고 삶은 견딜 만한 것이 못 되지만어떻게든 견디지만아름다운 귀신이 눈물을 보내왔네 흰 마당에서점...점을 싸는, 똥을 싸는 새 한 마리또각또각 또각또각 어린 구두 한 마리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25 봄호------------------손음 /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칸나의 저녁』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연구서 『전봉건 시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것들/이장욱

눈에 뜨이지 않는 것들​ ​이장욱   당신,  안 보는 사이에 뭔가 달라졌다. 미간이 넓어졌나. 말투가 좀 외국인 같네. 왜 유령을 좋아해.​ 무엇이 당신을 수정하고 있다. 죽은 사람의 책상 위에 앉은 먼지 같은 것이 마음의 물속에 가라앉은  쇠못 같은 것이 또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옛 일​ 자꾸 콕콕 찌른다. 어제의 거울과 오늘의 거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어째서  길에서 자꾸 외국인을 만나고 피부에는 알러지가 생기고 죽은 사람의 책상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 당신,  눈에 뜨이지 않게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어딘지 이상한 미소를 짓고 나는 의심스럽게 그것을 바라보고 시선은 마주치지 않는다.  안 보는 사이에  내가 당신을 수정했는지도 모르지. 책상 위에 유령의 물글씨가 적..

열흘 간의 유령/강정

열흘 간의 유령 강 정 사진 속 얼굴을 연필로 그리고 있자니,지금 어딘가 살아 있을 낯선 사람이나보다 먼저 살다 간 내 할머니 같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젊은 여인이오래전에 나를 보았다고 한다내 이름이 낯설어지고건물들의 등고선이 세 배나 내려앉는다 잘 다니던 길에 노란 무덤들이 봉긋하다거기 걸터앉아 술이나 한잔 마실까 하는데태양이 뚜벅뚜벅 네 다리로 걸어와무릎을 조아린다 길 잃은 개의 눈을 바라보듯흑점을 가만 보자니,수백 년 전 누가 그린 그림 속 천사의 날개가 불타고 있다 술잔에 옮긴 불덩이가 빛의 사다리를 따라다시 하늘로 오른다사흘 동안의 기억이 재가 되어 흩날리다가무덤가 동그란 돌멩이 되어 오늘 내 방에 구르고 또 다른 사흘 동안 주고받은 말들이거울 속에서 피를 흘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났더..

찔레꽃 패스워드/김영찬

찔레꽃 패스워드 김영찬 들찔레 장미꽃 향기는 이유도 없이 왜 왜 왜어찌하여 슬픈가슬프니까 그냥 슬프다그 향기는 생각할수록 더 멀리 날아가서너에게까지만그토록 깊고도 외로운비밀 찔레꽃 패스워드와 비밀번호를 몰라서 아무도열어볼 수가 없다슬프도록 낯선 그 침묵은낮12시 꽃 속에 점지해 놓은 그 하얀 고독으로 눈물 찔끔흘려도 상관없이 상큼한낮달 지나가 비로소 깊이 잠든밤12시 정오의 햇살에서 한밤중 자정에 이르기까지찔레꽃 그 그늘에 눌러앉아열아흐레 꽃 핀 얼굴 꽃 진 자리에 머뭇머뭇네가 서 있다말이 없는 낮달처럼 하얗게 너는 서 있다 계간 《시와 편견》 2024 겨울호-------------------------김영찬 / 충남 연기 출생. 외국어대 프랑스어과 졸업. 2002년 계간 《문학마당》 등단. 시집..

바니타스/김래이

바니타스 김래이 봄은 오면서 가는 것 같다고 당신이 말할 때벚꽃은 날아가면서 사라진다고 나는 말했죠 거리는 잘 차려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데사진을 찍을 때만 걸음을 멈추죠 한 여자가 줄기를 잡아채 볼에 가져가죠여자의 친구가 바통을 넘겨받고잡아당길수록 벚꽃은 자꾸 돌아가고 싶죠 허공으로 화관을 쓰고 날개옷을 입고 하나 둘 셋 소리에얼어붙는 요정들이 있어요 꽃 같은 건 관심이 없지만요정의 흔적은 남겨서 하원해야 된대요 나무는 정물일까 동물일까 당신이 물을 때공중에서 밝은 건 땅에서도 밝다고 나는 답하죠 네 사람이 한 나무 아래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요사진첩에 담긴 같은 풍경이 우리를 더 닮게 하나요한 장 두 장 아름다운 건 저장하고 싶어요 자꾸 절단하고 싶어요 이게 다 벚꽃이라는 계절 때문이죠가서 보지 ..

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최정례

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최정례 비행기 떴다아주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목요일은 한잠도 못 잤다금요일은 하루 종일 잤다토요일은 일요일은 사라졌다서른 살 땐 애 업고 전철역에 서 있었다15만 원짜리 카메라를 사서 할부금을 붓고 있었다스무 살 땐 레드옥스란 술집에서 울었다연탄가스 먹고 실려갔다비행기가 또 떴다 이곳을 뿌리치고가느다란 흰 선을 남기고사랑하는 자만이 날 수 있다그렇지만 누가 그토록 사랑하는가?라고 시작되는 시가 있었다누구였던가 누구의 시였던가그가 나가라며 등 뒤에서 문을 꽝 닫았다그때 그곳은 처음 가본 곳이라서 어디가 어디인지무작정 어두운 골목을 더듬어 내려오는데비행기가 소리 없이 구름 속으로 지고 있었다전화가 오고 전화가 끊어지고육체는 감옥이라서 달디단 크림케익을 먹고몸은 부풀었다육체의 창..

새장/박수현

새장 박수현검은 예장禮裝을 한 수도승 같았다두 기의 무덤* 사이 검은 풍금 한 대누가 이 후미진 곳까지 옮겨 놓았을까여기저기 무너지고 뜯긴건반들이 어찌 보면폐가의 처마 같기도 했다저녁 무렵이면 느릿느릿풍금 페달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두 옥타브 반짜리 바람상자에서 새는차라리 오래된 우물 속 같은새소리의 높고 낮은 음계들아무도 찾지 않는연세대 언더우드관 근처어느 손이 두 젊은 무덤을 달래러세상에서 가장쓸쓸하고 아름다운새장 하나 달아주고 싶었나보다 * 연세대 언드우드관 옆 언덕에는 연희전문 출신인 젊은 독립운동가의 무덤 두 기가 있다.    ▶몇 년 전 연세대 언더우드관 쪽 언덕길을 걸었다. 갈참나무 숲, 사이로 3기의 무덤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2기의 무덤 사이 마치 검은 예장禮裝을 한 수도승 같은 풍금 ..

그리운 중력重⼒ /강영은

그리운 중력重⼒  ​ 강영은 ​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

물의 아이/안차애

물의 아이―명리시편 60. 계해일주(癸亥日柱) 안차애   몇 생을 흐른 것인지,물도 오래 흐르면 화석이 되는 걸까 물이 물을 씻어서 낸 색이아이와 노인을 번갈아 입는다 남들은 투명이라 부르지만주저흔보다 오래된 켜 켜의 표정이다 마녀처럼 미녀처럼 새벽안개를 헤치고 나타나산책 같이 하실래요건너편 동에 사시죠명랑하지는 않지만 무심무심 몇 굽이 같이 흐른다 먼 길 떠났다 돌아오는 물소리나, 푸른 소沼의 한식경처럼어둠에 섞여 있어도 어둡지 않고고인 웅덩이에서도 초점을 밀어 올린다 성소를 만난 죄인의 심정이 이럴까내 죄의 연대와 내력을 주섬주섬 풀어놓고 싶다 오래 외로워서 많이 검어졌다고우는 것보단 죄 짓는 걸 택했다고,밀린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었다 헤어질 모퉁이에선물의 뼈 하나 툭 던져주듯낮은 인사를,  계간 《..

YTN/이장욱

YTN 이장욱빗방울이 구름을그리워할까요?부러진 가지가 나무를?해변에 밀려온 파도가수평선을?내가당신을…… 안에서 닫힌 것들이 세상에는 많아서골목 저편에는 어둠이로커 안에는 의심스러운 가방이교회에는 하느님이그러므로 당신 마음에는누가 있는가? 나는 영영 비밀번호를 잊었는데어쩌면 처음부터 몰랐는지도 모르지.나무에게는 잃어버린 가지가 없고구름은 다른 하늘을 떠가고해변의 파도는 처음부터수평선의 일부 나는 나무에구름에십자가에열쇠를 넣고 돌려보았다.또는 0에서 9까지 무작위로 눌러서전 세계를 열어 보려고…… 그곳에는 구멍이 없고번호가 없고마침내내부가 없어서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고양이를 쓰다듬고조금 운 뒤에뉴스를 시청하였다.계간 《詩로여는세상》 202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