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5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12

나를 막지 말아요/정채원, [이성혁의 열린 시세상]

[이성혁의 열린 시세상] 나를 막지 말아요 정채원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 마음을 콕 찌르는 시다. 노래는 가슴에 뚫린 “구멍 몇 개를 막으면”서 피리처럼 발현되고, 그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된다. 뚫림은 고통스럽지만 막힌 가슴에 예술의 숨통을 튼다. 하여, 뚫림과 막힘의 변주를 통해 다채롭게 이루어지는 노래와 춤-“구멍이 다 막”힌다면 공연될 수 없는-은 고통과 자유를 모두 품고 있다. ..

넝마주이 사랑법/고영섭 해설(좋은 시집 좋은 시)

넝마주이 사랑법 정채원 시간의 넝마를 주워다 솔기를 꿰매고 속을 채우고 너와 꼭 닮은 인형을 만든다 너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내가 잠들면 너는 깨어나 오래된 서랍을 열고 꽃을 피운다 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나는 잠시 맑은 정신으로 창문을 닦고 책상 앞에 앉는다 바람 없는 날에도 네 옆구리에서 모래가 흘러내리고 젖은 한쪽 팔이 물풀처럼 휘적이다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리고 우리의 백년 묵은 천년 묵은 넝마까지 구해 와 네 찢어진 상처에 덧대고 꿰매는 밤 바늘이 지나가는 곳 피가 번지는 곳은 내 가슴이다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이 시에서 시인은 '나'를 넝마주이이며 시간을 줍는 사람으로 그려낸다. 시인은 "네 찢어진 상처에 덧대고 꿰매는 밤"이라는 진술에서처럼 밤과 낮을 대비하여 '밤'은 낮동안 ..

걱정의 단짝이 되어-정채원 시인의 「걱정인형」을 읽고/서대선

걱정인형 걱정의 활용법을 알려 줄게 걱정은 헤엄을 잘 쳐 조금씩 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 하늘이 무너지기 전 잠시 문자를 보내려 자리를 뜬 사이 책장이 무너져 내렸지 부러진 시곗바늘을 껴안고 잠들었지 꿈속에선 만나는 얼굴마다 다리가 부러져 있고 빗길을 절룩이며 끝없이 걸어가지 젖은 옷은 마르기 전에 다시 젖고 마주 잡는 손마다 축축하지 부은 발을 뜨거운 욕조에 담근 후 한숨 푹 자고 나면 잊힐 겁니다 간신히 입꼬리를 올린 후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사람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내가 잠든 동안 새벽까지 쉬지 않고 걸어도 나는 집에 당도 하지 못하네 다 지나갈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긴 가뭄 속에도 빗길을 절룩이며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걱정을 품에 꼭 안고 가네 푸른곰팡이..

고독한 사랑의 가능성/차성환

고독한 사랑의 가능성 -정채원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시작, 2022) 서평/차성환(문학평론가) 정채원 시인은 인간의 몸이 단순히 뼈와 살과 같이 물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비루한 육신 너머에 초월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유한자로서의 우리의 몸은 죽음으로 종결되는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육신 너머의 어떤 초월적 지점, 무한에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를 새롭게 갱신시킨다. “백만 년 전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울고 처음부터 다시 싸워 처음부터 다시 사랑해”(「꽃 피는 단춧구멍들」). 그의 시는 울음의 갱신이고 싸움의 갱신이고 사랑의 갱신이다.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시작, 2022)는 어떤 의미에서 가히 종교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숭고한 투..

Editor's Pick/김병호, 나의 독자들에게/정채원

Editor's Pick 정채원의 시들은 도통 나이를 알 수가 없다. 애늙은이이거나 철없는 어른 같다. 그저 상상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숙성된 사유를 짐짓 외피적 현상으로 그려낸다거나 단순한 대상에 본원적 가치를 덧씌우는 모습이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융숭깊다. 감각과 사유가 한데 고이지 않고 매 시편마다 제각각 통통거린다. 시는 무엇에 제한을 두지 않고 넘나들며 시를 3D나 4D쯤으로 조립한다. (...) 가을호가 나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시집이 쌓인다. 행복한 고민은 두어 달 묻어놓을 참이다. 문득 시집에 붙은 이름이 허명 같을 때가 있다. 부풀려진 이름값 말이다. 시집에서 시인의 이름을 빼면 어떨까? 아주 큰일이 날까? 등단 매체와 문학상, 마피아 카르텔 같은 이상한 조직의 후원 없이 시로만 읽히면 ..

<시가 흐르는 아침>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정채원 쉬지 않고 내리는 빗물이 사막에 수백 개의 호수를 만든다. 우기가 끝나면 가장 깊어지는 수심을 들여다본다. 떨어져 있는 호수와 호수가 하얗게 타는 모래 밑에서 서로의 냄새를 더듬는다. 바다에서도 본 적 없는 주황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사막 호수, 석 달이 지나면 사랑은 말라버리고 모래에 처박힌 바퀴는 점점 더 꼼짝달싹 못 할 것이고. 모래바람 속으로 눈썹에 내려앉는 모래를 깜빡이며 걷고 또 걷는다. 건기 뒤에는 우기를, 우기 뒤에는 건기를 마련한 건 누굴까? 그러나 건기를 지나도 또 건기, 우기를 지나도 또 우기, 그런 마을도 있다. 모두가 메말라 기억의 핏줄까지 마른 잎맥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지던 마을, 혹은 젖고 젖고 푹 젖어 푸른 곰팡이가 수국 꽃송이가 되다 쉰 ..

비로소 꽃 [詩의 뜨락], 세계일보

비로소 꽃 [詩의 뜨락] 관련이슈詩의 뜨락 입력 : 2022-08-12 18:04:14 수정 : 2022-08-12 18:04:13 정채원 나는 피었다가 기필코 지는 꽃을 사랑한다. 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해 슬퍼하는 꽃을 오래 사랑한다. 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꽃을 더 오래 사랑한다. 피기도 전에 져 버린 꽃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패색이 완연한 계절, 내 안에 너는 아직도 피어 있다. 비로소 꽃이 되었다, 서로에게.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시작) 수록 ●정채원 시인 약력 △1951년 서울 출생. 1996년 월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일교차로 만든 집’ ‘제 눈으로 등을 볼 순 없지만’ 등이 있음. 한유성문학상 등 수상..

[8월의 좋은 시] 북극의 8월

[8월의 좋은 시] 북극의 8월 기자명 김인종 기자 승인 2022.08.12 16:09 댓글 0 북극의 8월 정채원 팔을 한껏 벌리고 8월이라고 얼음이 녹는다고 훨훨 춤을 추었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 북극곰은 어떻게 물개를 잡을 수 있나 발판도 없이 너는 무얼 사냥할 수 있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 해빙이라고 북극에서 발판도 없이 8월이라고 정채원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천년의시작 시평(詩評) 8월과 얼음은 어찌 보면 대칭관계다. 아무리 무더운 8월이지만 북극에서 얼음이 녹는다고 춤을 출 정도로 기뻐해야 하는가.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면 생물학적으로 볼 때 환경의 변화로 생태계가 교란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며, 북쪽 극지의 먹이사슬 중 최상위 북극곰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능 접착테이프」를 읽다/권영숙

정채원 시인의 신작 시집 란 시집을 읽었다. 이 시인은 도대체 언어에 관해서는 세월과 타협이 없다. 느긋하게 인생에 대해서 한 자락 깔 법도 한 연배이신데, 언어적 실험을 치열하게 시도하며 피흘리며 시를 쓰신다. 내용은 인생의 철리를 다루는 곡진하고 깊은 시인데 언어는 파릇하게 젊다. 그래서 시읽는 재미가 있다. 시 한 편을 올린다. 다사다난한 인생의 간난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줄 만능 접착테이프를 발견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능 접착테이프」정채원 시인 바람벽에 선반을 붙이고, 그 위에 쌀 10킬로를 올리고, 그 위에 시름 10 킬로를 더 올려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건 강력 테이프 덕분이다. 마음속 비탈에 코끼리를 붙이고, 하마를 붙이고, 도깨비를 붙여도, 쉽사리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 건 강..

[문태준의 詩 이야기] 정채원 시 '북극의 8월'

북극의 8월 정채원 팔을 한껏 벌리고 8월이라고 얼음이 녹는다고 훨훨 춤을 추었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 북극곰은 어떻게 물개를 잡을 수 있나 발판도 없이 너는 무얼 사냥할 수 있나 발밑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 해빙이라고 북극에서 발판도 없이 8월이라고 ---------------------------------------------------------------------------------------------- 지구 온난화가 심각하다. 외신에 따르면 그린란드에서 사흘 동안 180억 톤의 빙하가 녹아내렸다고 한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가 급격하다.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사냥터가 사라진 북극곰이 인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 한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북극 극지방의 현실을 언급하는 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