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최정례의 「가물가물 불빛」 감상 / 박준

Beyond 정채원 2021. 9. 17. 12:19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하고 갔어
가물가물 땅속으로 꺼져갔어

왕릉의 문 닫히고
석실 선반 위에 그 불빛
얼마 동안 펄럭였을까
왕이 죽고 왕비가 죽고
나란히 누운 그들
칼을 차고 금신발을 신고
저승 벌판을 헤맬 동안
그 불꽃 혼자 어떻게 떨었을까

당신 나 끝이야
이젠 우리 죽은 거야

가물가물 마지막 불빛 사윈 다음
또 몇 세기를 캄캄히 떠내려갈까
금관도 옥대도 비스듬히 쓰러졌지

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왕비 어금니 하나 반짝 눈떴지

얼마를 헤매게 될까
당신이 있는 세상 거기
그래도 봄이면 새풀 돋겠지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다
냇물은 소리치며 돌아 내려가겠지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시집 『붉은 밭』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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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관계의 죽음이든 육체의 죽음이든 별리(別離)는 그간 나눈 모든 것들을 땅속 깊이 묻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이곳에서도 사랑의 시간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한 이후에도 한동안 불빛이 펄럭이는 것처럼. 사위고 쓰러지고 무너지는 것들로 가득한 와중에서도 썩지 않는 어금니 하나가 반짝 빛을 내는 것처럼.
이 작은 빛은 또 얼마나 유구한 시간을 혼자 헤매게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모든 것들 위로 “새풀”이 돋고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는 때가 분명히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쯤 가면 우리도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하고 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박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