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의 시간
지금 그것은 수국 같습니다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깊이 스며든 게 눈물인 걸 알았겠습니까
한창 피는 중입니다 뿌리는 은밀해질 테지요
수국은 울지 않았습니다
같은 실루엣으로 하얗다가 파랗다가 빨갛다가
수국이 수국을 죽이고 수국이 수국을 살리는 중입니다
우리는 덩달아 풍성해집니다
수국이 우리를 움직이고
눈멀게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끝날 것 같은 기분에 빠집니다
해칠 의도가 있겠습니까
눈물을 좋아할 뿐 더 아름다워지고 싶을 뿐
누군가의 죽음을 원했겠습니까
평화로운 세상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우리는 다짐 같은 걸 합니다
잠꼬대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어서
버둥거리는 벌레들과 가늘어 가는 줄기를 붙잡고
지금 수국은 수국 아닌 것과 반목하는 중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중입니다
수국은 수국만을 볼 겁니다 나 없이도 가득할 거 같습니다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이곳에서
우리는 좀 더 놀라워해야 합니다 답 없는 문제는 잠시 상상에 맡기고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지금 나는 수국이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처음인 양
눈물과 구름의 흔적은 없어요
양과 양 사이 보이는 대로 본다면
어떤 양은 머리를 박고
어떤 양은 입을 벌리고
양들이 몰려 있어요 울타리 아래에
별생각 없이 만졌는데 손을 끌고 들어갑니다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는 자꾸만 넘어지고
매일 새로운 양이 태어나 데려갑니다
누군가 밀면 밀리는 대로
양과 양 사이
저절로 서로를 밀면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죽어서 처음인 양 낮은 목소리로
혼자 서 있는 사람은 양이 되어야 한다고
먼저 말한 사람은 없고
밥알을 곱씹으며 침묵을 뱉어 냅니다
소매를 끌고 머리를 맞대도
울음은 옆구리 속에서 얽히고설킨 듯
매일이 그렇게 중첩된다면
침묵은 목초지를 넓힐 수도 있을 거예요
양은 양을 보면서 달립니다 새로운 곳에 닿으려는 듯
울타리의 안과 밖 사이
머리를 내밀고 침을 흘려도
아무리 멀리 떠나도 마냥 그 자리입니다
구름은 양의 울음으로 만들었어요
울타리도 없이 흘러간 구름은 돌아오지 않아요
따뜻하고 거친 등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듭니다
최지온 시집 《양은 매일 시작한다》, 파란시선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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