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살
이기인
늦봄과 초여름 사이 찾아온 감기가 좀 나아질 무렵
하루 세 번 챙겨먹은 약봉지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부스럭부스럭 찾아오신 어머니가 감기를 가지고서 고구마 줄기처럼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감기가 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나기가 좀 억세게 오는 것 같다
윗목에 앉아 억세게 비를 맞고 계신 큰 잎사귀의 몸살을 본다
-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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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의 원칙. 첫째, 친구를 들이지 말 것. 허전한 마음을 다잡으려면 머물고 간 시간의 곱절이 요구됨. 둘째, 혼자 있는 게 힘들 땐 산책을 할 것. 셋째, 음악을 듣되, 건조한 클래식이나 록 혹은 메탈일 것. 김광석이나 이소라는 절대 피할 것. 미칠 수도 있으며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음(가슴이 찢어진 경우도 실제 있었다고 전해짐). 넷째, 가급적 부모님과 통화하지 않을 것. 끊고 나면 내가 뭘 하고 있나 한탄하며 아무 일에도 집중하기 어려워짐. 반찬을 들고 시골서 올라오신 어머니에게 도서관 간다며 내빼고서, 하루 종일 놀다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말끔해진 방과 깨끗이 빨아 차곡차곡 개어진 빨래들.
조재룡 문학평론가ㆍ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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