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정채원의 「뒤집히거나 부서지거나」/임종명

Beyond 정채원 2024. 1. 27. 14:40

뒤집히거나 부서지거나 / 정채원

우리는 그곳에 가야한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칼날 같은 파도를 헤치고

난파선을 타고라도 가야한다

배가 부르고 포만감에 졸음이 쏟아져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순 없다

매 순간 떠나야한다

먼저 도착한 일당이 원주민처럼

텃세를 부리며

천길 벼랑으로 등을 떠밀지 모르지만

그곳에 원주민은 없다

이미 부러진 목이 다시 부러지고

무덤 속에 있던 반쯤 부패한 입술이 깨어나

푸른 립스틱을 바를지라도

우리는 기필코 그곳에 가야한다

그곳은 도착하자마자 이곳이 되고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가야할 이유만 있다

- 계간 『서정시학』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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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가야하는 '우리'는 어떤 공동체일까. "칼날 같은 파도를 타고/ 난파선을 타고라도 가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배가 부르고 포만감에 졸음이 쏟아"지는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떠나야만 하는 '우리'. 그 '우리'의 눈으로는 그곳에 원주민은커녕 아무것도 없지만, 사실 그곳엔 "먼저 도착한 일당이 원주민처럼" 있다. 닥치고 그곳에 가야하는 당위만 있는 '우리'에서 가자지구를 침공해 초토화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떠올린다. 그곳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니 뒤집히든 부서지든 상관없다는 얘기인데 정말 속이 뒤집히고 마음이 부서져 내린다. /숲속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