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휴약기 외 1편/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5. 3. 31. 22:00

휴약기

 

 

 

온몸에 이면도로가 생겨난다

긁을 때마다 개가 짖는다

 

구약도 신약도 아닌

두통약을 한동안 끊으라고

 

참을 수 없이 날개뼈가 가렵다

피나도록 긁고 싶은데

늘 손이 닿지 않는다

 

닿지 않아 더 간절히 눈 감는 곳

 

참는 자에게 몫이 있다고

진흙탕천국이 너의 것일 수도 있다고

 

상비약병을 열다 다시 닫는다

두드러기 약으로 바꿔볼까?

약은 약이나 전혀 다른 도약이

나를 구원하리라

 

사랑의 완성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두드러기 나기 전에 끊는 것

 

개소리를 무시하고

우리는 같은 약을 너무 오래 복용했다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오래전 부서진 누군가가

손짓하며 부르는 듯

 

4천 미터 해저로 들어간 거다

25만 달러를 내고 잠수정을 타고

 

심해 관광을 떠날 때

사인을 했다, 쓰레기는 두고 간다고

죽어도, 불구가 되도, 책임 물을 일 없다고

 

억만장자 전 재산을 세상에 남겨두고

몸만 떠난 거다

 

한동안 잠수를 타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다 아는 척

 

언제고 동침할 수 있는 죽음이

두근두근 떠다니는

황홀한 심해(心海)에는

 

더 이상 부서질 일 없는 난파선이 상주하고 있다

 

 

 

 

* 미국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스톡턴 러시의 말. 그가 조종했던 잠수정 타이탄’(난파선 타이타닉 탐사용)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파란》 202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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