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
아픔은 정체 모르는 과일이다.
가슴에 총소리가 고이고 이마에 폭탄이 터질 때 썩은 과일처럼 짓무
르는 증상이 몸에 속한 건지 마음에 속한 건지 그 맛을 알 수 없다.
고통의 진실은 생각 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을 두둔하지만, 생각이
모르는 아픔도 있는 것인지 아픔이 몰고 오는 전쟁터를 알지 못했다.
어느 저녁에 나는 숲속에 있었다.
벌 떼가 아카시아꽃에 몰려드는 것처럼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아
픔이 있는 건 아니었다.
노을이 지고 떠돌이 별처럼 헤매는 피의 향기가 숲속으로 흘러들
었다, 누구의 무덤에서 풍겨 나오는 것일까.
뉴스에서 보았던 시신(屍身)들, 무덤에 닿지 않은 생명들이 썩은 과
일처럼 버려지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생각 속의 느낌이 흐느낌으로 변할 때, 어둠 속을 흘러 다니던 몸과
마음이 나에게까지 왔다. 마침내, 아파왔다. 아픔이 생각의 중심이 되
었다.
과일이 과일인 것을 모르듯 아픔이 아픔인 줄 모르는 전쟁은 끝나야
한다.
손긑으로 돌리면 나타나는 지구의의 어느 한 지점, 지구상의 어느
한 나라를 돌고 왔는지 마침내, 나는 생각 안에서도 생각 밖에서도 아
픔밖에 모르는 지구인이 되었다.
《문학청춘》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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