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로보로스
정채원
몇 겹 어둠 속을
제 꼬리를 물고 맴돌았나
눈뜨면 다른 방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았다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얼굴을 다른 말들이 밟고 달려갔다
피는 내 가슴에서 흐르고
나는 아직도 살아 있나 뙤약볕 아래
표범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깨어났다
찢어진 콧잔등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알갱이
안간힘을 쓰며 흘러내리지 않으려는
모래알갱이, 바람이 불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아눕는
구겨진 파지가 휴지통 근처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방
검은 잉크로 물든 검지를 한참 내려다보다
읽던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버렸다
언제나 단칸방이었다
아기를 재우고 있었다
아기가 빨던 공갈젖꼭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자장가를 부르다 하품을 하다 그만 잠들어버렸다
방은 하나뿐이라는데 낯선 방은 자꾸만 열리고
먼지바람 날리는 붉은 별에서 뱀처럼 바닥을 기었다
어둠 속에 소리쳐 다른 생명체를 찾았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밤안개가 입김처럼 가슴을 덮었다
수많은 뒤통수가 떡 버티고 선 어둠속으로 검은 물체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 어깨를 사납게 치며 사라져갔다
돌아서지 않는 얼굴, 문득 잠 깨면 너와 내가 바뀌어버린 얼굴
잠속의 잠으로 꿈속의 꿈으로 방은 끝없이 이어지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사이 서로를 잊었고
다른 방에서 마주쳐도 화살자국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살을 쏜 자도 화살을 맞은 자도 그 누구도
시집『일교차로 만든 집』 중에서
'자각夢, 정채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구/정채원 (0) | 2015.03.29 |
---|---|
DMZ/정채원 (1) | 2015.02.23 |
예감/정채원 (0) | 2014.12.23 |
고통이 비싼 이유/정채원 (0) | 2014.12.10 |
[스크랩] 미발표작/정채원 (0) | 2014.06.08 |